수경원 터에서 사도 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만나다

글: 하늬바람~ 

 

 

수경원 터의 정자각. 생김새가 고무래 정(丁)자이기에 정자각이라고 한다. 묘와 석물은 서오릉으로 옮기고 이곳엔 정자각과 비각만 남아 있다.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옆 ‘역사의 뜰’ 안에 정자각이 있습니다. 아니, 대학 캠퍼스에 웬 정자각일까요? 아마, 서울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자각은 조선의 왕릉과 원의 제사를 지내는 전각(殿閣)이자 죽은 이의 침전(寢殿)입니다. 제례를 지낼 때 이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게 됩니다. 그런 제사 공간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묘역이었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정자각은 수경원의 것으로, 이곳엔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 세자의 어머니였던 영빈 이씨가 묻혀 있었습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하고, 세자나 세자빈, 왕의 어머니와 아버지인 대원군의 묘는 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훗날 장조로 추존된 사도 세자 어머니의 무덤인지라 ‘수경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영빈 이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녀의 남편이자 한 나라의 국왕이었던 영조는 ‘임오년의 대의를 좇아 백세의 의리를 세운 이가 정조의 할머니였던 영빈 이씨’라고 했습니다.(《영조실록》40년 9월 26일) 이 말은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이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인 영빈 이씨라는 말이 됩니다. 임오년(영조 38년, 1762)의 대의란 사도 세자가 뒤주에서 죽어야 했던 일. 그러니까, 영빈 이씨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편에 섰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녀는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어머니가 되었던 것일까요?

 

 ‘어제영빈이씨묘지(御製暎嬪李氏墓誌)’라 씌어 있는 묘지석이 석함에서 2벌 나왔다.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글씨는 사위 금성위 박명원(화평 옹주의 부군)청화백자로 구웠다.(사진: 문화재청)

영빈 이씨는 여섯 살에 궁에 들어와 영조 2년(1726)에 숙의에 봉해졌습니다. 그때 나이는 서른 살. 이미 성은을 입어 옹주를 낳을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영빈 이씨는 막내 화완 옹주를 비롯해 옹주 다섯을 낳았지요.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의 러브 스토리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상당히 미색이었던 것 같고 나인이나 상궁이 아닌 더 천한 궁인으로 보기도 하는 것에 비추어 영빈에게서 어머니 숙빈 최씨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아닐는지요. 영빈이 사도 세자를 낳기 5년 전(영조 6년)에 이미 ‘빈’에 봉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 대한 영조의 사랑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비도 없는 텅 빈 비각이었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왠지 비감을 강조하는 듯하였다.

한미한 집안에 기댈 곳이 없던 영빈 이씨는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기여했던 노론의 편에 서서 남편을 돕고자 했었겠지요. 점점 소론의 편으로 기울어져 가는 사도 세자. 어쩌면 세자가 사람을 죽이고 의대증에 시달리는 등 정신질환까지 가지게 된 것은 노론과의 대결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을 어머니 영빈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어머니 영빈은 아들이 저지른 일들에 가슴 아파하며 몸져누워 “어떡하나!”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빈은 끝내 영조의 편에, 노론의 편에 서서 아들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이른바 노론의 조작극인 ‘나경언 고변 사건’ 이 있고 한 달 뒤. 영빈은 영조에게 대처분을 내리라 요청하였습니다. 이미 세자를 버리고 세손을 세우기로 결심한 영조에게도 명분이 필요했을 것. 그때 영조는 세자의 생모가 세자의 잘못을 밀고하며 처분을 내리라 하자 이것을 명분으로 삼아 세자를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영조는 이것을 ‘임오년의 대의’라 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3백 년 종사가 망하고 세자가 죽으면 종사가 보존될 것이니 세자가 죽는 것이 대의라 했지요. 

 

 

현판의 글씨는 영조가 직접 쓴 것이다.

 

영빈 이씨는 아들 사도 세자가 죽은 지 2년 뒤에 죽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후궁 제일의 예로 장사 지내며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지금 연세대 안에 자리한 무덤은 의열묘,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 쪽에 지은 사당은 의열궁이라고 했습니다.

영조는 영빈 이씨를 기려 《어제표의록》까지 지어 그녀의 의로운 결단을 칭송하였지요. 물론 그것은 임오년에 행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심지어 정조에게는 ‘너의 조모가 없었더라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느냐’며 정조가 왕이 된 것을 도운 할머니를 이해하라고 하였지요.

그러나 아버지를 끝까지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였던 정조는 할머니 영빈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정조는 할머니 영빈의 궁호를 ‘의열궁’에서 ‘선희궁’으로 바꾸었지요.

 

정자각 앞에 향나무. 언제 심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상당한 나이일 것으로 보인다. 향나무는 주로 묘지 주위에 심었다.

의열묘가 수경원이 된 건 고종의 대한제국 때입니다. 사도 세자는 정조 때 장헌 세자로 추존되어 묘는 현륭원이 되었고, 광무 3년(1899)에는 장조로 추존되어 현륭원은 융릉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의열묘 역시 수경원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선희궁은 칠궁으로 옮겨졌고요.

1969년 수경원은 서오릉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은 정자각과 거목으로 자란 향나무만이 250여 년간 이곳에 잠들어 있던 영빈의 영욕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영빈 이씨가 임오년의 대처분을 바란 것은 어차피 노론의 손에 죽을 운명인 아들 대신 세손(정조)을 선택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쫓기고 쫓겨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빈 자신은 사도 세자의 생모가 아니든가요? 좀 더 일찍 아버지와 아들의 뒤틀린 사이를 조정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이렇게 석함에 담아 묘지 안에 묻은 그릇을 명기라고 한다. 모두 20점. 보, 작, 향로 같은 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의 모양이다. 정갈하고 빛깔이 고운 백자가 죽은 이에 대한 영조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임오년 그해의 윤5월도 올해처럼 더웠을까요?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아들이 뒤주에 갇혀 있던 8일간, 영빈도 잠을 이룰 순 없었을 것입니다. 정자각 앞에 서니 관 앞에서 통곡하던 한 어미가 떠오릅니다. 그 여인은 여전히 자신의 선택이 의로운 결정이었다고 칭송 받기를 원하고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무덤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 슬퍼했던 것이 진정 그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 또한 당쟁의 희생양이었으며, 정치적 주도권이 없었던 조선 여인의 한계였노라고 하기엔 왠지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습니다. 영빈이 좀 더 단단한 여인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쟁의 회오리에 맞서 아들 사도 세자 편에 설 수는 없었을까? 아쉽고 안타까운 점입니다. 

 

수경원 터에 세워진 ‘연세 역사의 뜰’ 문. 왼편으로 정자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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