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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 이야기 : 첫 번째 - 왜 ‘전등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3. 24. 00:37

초등사회 4-1 1. 우리 시.도의 모습 3) 우리 시.도의 달라진 모습


 강화도 전등사 이야기

첫 번째 - 왜 ‘전등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글.  겨울사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에 가서 정족산성(삼랑성)의 성문을 지나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아주 오래된 사찰인 전등사가 있습니다.

전등사는 우리 민족에게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서기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합니다.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에 불교를 전했는데 강화도에 머물 때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지었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진종사’를 ‘전등사’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고려 때 고려 왕실에서는 진종사의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짓고 진종사를 크게 고쳐지었습니다. 그리고 충렬왕 때에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 등을 바치면서 ‘전등사’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전등(傳燈)이란 ‘등을 전했다’라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 즉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전등사는 ‘불법을 전하는 사찰’이라는 뜻이 되지요.

그런데 정화궁주는 어떠한 마음으로 전등사에 등불을 전하게 되었을까요?

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 원나라에서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후 고려의 여인인 정화궁주를 다시 왕비로 맞았지요. 이때부터 정화궁주와 원나라 공주는 서로 질투를 했답니다. 정화궁주는 ‘무녀를 시켜 공주를 저주했다’는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왕의 사랑을 빼앗기고 아들마저 떠나자, 정화궁주는 전등사에 쓸쓸한 마음을 의지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등사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본 도량이었습니다.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돌아간 뒤 강화도의 궁궐 터와 성곽 등은 모두 몽골에 의해 폐허가 되었지만 전등사는 꾸준히 이어갔고,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지어 전등사에 보관하게 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답니다. 또한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