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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독립 운동가 이회영을 기억하나요?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8. 19. 18:40

자신의 한계를 끝없이 뛰어넘어
        
애국의 길을 간 우당 이회영 선생을 찾아서…

  글:하늬바람~

간도로 망명을 떠나기 전의 이회영. 1867년에 태어난 그는 이때 44세의 장년이었습니다.

<독립 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을 아십니까?>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나라를 ‘합방’ 한다는 조약에 나란히 서명하고도 무엇이 두려운지 쉬쉬하다가 일주일 뒤인 8월 29일, 순종을 압박하여 서명도 날인하지 않은 ‘칙유’를 공포하도록 하였습니다. 생각할수록 치욕스럽고, 그날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지만 부서져라 가슴을 탕탕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라 팔아먹기에 앞 다투어 경쟁하던 송병준과 이완용뿐 아니라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기득권에 안주했던 76명의 명단을 국치일 100해를 맞아 광화문 네거리에 걸어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랏돈이 아닌 개인이 지어 작은 규모의 기념관입니다.

가슴에 차오르는 분한 마음을 안고 오늘은 우당 기념관을 찾아보았습니다. 자하문 가는 길 신교동에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작은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곳엔 검은 누비옷에 모자를 쓰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사진 속의 우당 선생이 계셨습니다. 맑고 형형한 눈빛의 아나키스트였던 독립 운동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종의 수결이 찍힌 헤이그 밀사들이 가져간 신임장

<헤이그 밀사 사건의 또 다른 배후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하면 이준 열사, 그리고 이상설과 이위종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헤이그에 그 세 사람이 가기까지 그 뒤에는 우당 이회영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을사조약을 반대하며 전개되었던 상소 운동도 무위로 돌아가자, 우당은 강도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론에 호소해 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이미 손발이 묶인 채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었지요. 어떻게 고종의 동의와 신임장을 받을 것인가?

이회영은 사돈인 궁내부 대신 조정구와 내관 안호형을 통하기로 했습니다. 고종의 매형이었던 조정구의 딸(조계진)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이회영은 조정구를 통해 밀사를 파견할 것을 고종에게 주청할 수 있었지요.

고종은 사진에서 보는 저 신임장을 기꺼이 내 주었습니다. 헐버트가 궁 밖으로 신임장을 가져나오고, 이회영은 비밀리에 간도에 있는 이상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몹시도 긴박한 상황이었던지라, 고종은 수결만 해서 내 보내고, 그 내용은 밖에서 썼다는 이야기를 기념관에서 들었습니다.

물론, 헤이그 밀사 사건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일로 고종은 물러나야 했고, 군대도 해산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주도했던 이회영, 이상설 등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것은 군대를 양성하고 힘을 키워서 무력으로 맞서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민회를 시작으로 이회영 선생과 함께 했던 독립 운동가들. 신채호, 조완구, 김동삼, 이동녕, 양기탁 선생들이 보이네요.

<더 이상 치욕스러운 땅에 머물 수 없다! 떠나자, 간도로!>
을사조약 이후 이회영은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가 상동교회에서 학감으로 일하고, 양반 유생들의 위정척사파가 아닌 개화파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던 것도 참 독특한 점입니다.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식을 상동 교회에서 올린 것을 보면, 참으로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회영의 집안은 10대조 백사 이항복뿐 아니라 정승이 여덟에 대제학을 셋이나 배출한 그야말로 삼한갑족의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노론이 주도하던 조선 후기에 소론으로 살아왔고, 그래서 야당 정신을 가졌기에, 어쩌면 새로운 사상에 귀 기울이고 기득권을 버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민회는 독립협회 멤버들이 주축이 되었었지만 훨씬 진일보한 운동 조직이었지요. 기어이 한일병합이 공포되자, 신민회도 독립전쟁론, 무력투쟁론을 결정하였습니다.

빼앗긴 땅에서는 한시도 머물 수 없다며 일가족 40여 명이 함께 떠나기를 결의하는 여섯 형제

이회영 여섯 형제가 이 땅을 떠나기로 한 것이 그때입니다. 북풍이 몰아치는 1910년 12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겨울입니다.

그림 속의 여섯 형제의 삶은 안락해 보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우당의 제안에 호응하여 그 안락함을 버렸습니다. 재상 집안에 걸맞게 나라의 위급함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지요.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의 재산은 당대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갑부였다지요. 그 재산을 포함하여 생가까지 모든 재산을 급히 팔아 40만 원(지금 600억 원이 넘는 돈, 땅값으로 환산하면 2조 원이 될 수도)을 독립 운동 자금으로 가져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월남 이상재 선생이 그들의 행동을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표현한 것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집안이란 표현 또한 부족한 것 같습니다.

 

  훈련을 하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모습

<독립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독립전쟁 -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자>
물설고 낯선 게다가 추위가 쩡쩡한 간도 땅에서 터전을 일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합니하의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를 연 것으로 시작하여,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문을 닫을 때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아리랑’의 김산(본명은 장지락)도 무관학교 졸업생입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의 독립전쟁과 무수한 의혈 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하였지요. 아마 이곳에서 배우고 가르쳤던 이들을 빼놓고 한국의 독립 운동사를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 간도에 정착하여 일군 일이 바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지켰던 일입니다.

우당 기념관에는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 31분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난치는 것을 즐겼던 우당은 간간이 난을 쳐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이회영 선생은 이름을 앞세우지 않는 무장투쟁론자라 할 수 있을까요? 동생인 성재 이시영이 임시정부에 남을 때도 외교론을 앞세운 행정조직 형태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말했지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 통치를 청원한 것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는 것’과 같다고 맹렬히 비판하였습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임정(상해)을 떠나 북경에 자리 잡은 이회영은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또 의혈 투쟁이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동시에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독립 의지를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회영의 북경 집은 독립 운동의 산실과 같은 일을 하였죠.《상록수》를 쓴 심훈이 우당의 집에 머물며 보살핌을 받았던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담이지요. 그 집을 떠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심훈에게 통김치를 싸다 주는 자상하고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년대 북경 시기에 이회영은 의열단을 지원하고, 그 자신 남화연맹의 일원이 되어 아나키스트들의 의혈 투쟁을 지원하였습니다.

의열단과 비슷한 활동을 했던 다물단에는 유자명과 함께 아들 이규학이, 더 뒤에 만들어지는 흑색공포단에는 역시 아들 이규창이 함께 합니다. 이회영 일가는 그야말로 온 집안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항일 정신을 높이 새기며 중국정부에서 수여한 항일 열사 증명서
1921년 북경 시절의 우당 이회영

<우당, 참된 벗들과 아나키즘을 자신의 이념으로 받아들이다>
1923년 말부터 우당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밝혔습니다. 아나키즘을 무기로 한 독립 운동에 수많은 동지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 같은 아나키스트들. 신채호, 김창숙, 이회영은 북경 그룹의 삼인걸이었다고 하네요.

아나키즘을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였는데, ‘해방’ ‘독립’이라는 지극히 민족적 과제를 안고 출발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아나키즘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연합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당은 태생적으로 몹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강철 같은 조직과 국가 체제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가 훨씬 독립 운동의 이론으로 손쉬웠을 텐데, 그에겐 그런 주의를 넘어서는 높은 이상과 목적의식이 충만했었던 걸까요?

그런데 왜 내겐 이들 아나키스트들의 삶과 투쟁이 그들의 깃발 색인 ‘흑색’ 만큼이나 ‘슬프게’ 다가오는지요. 아나키즘은 어쩌면 인간과 사회를 몹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론인데, 오래 전 보았던 <아나키스트>라는 영화의 몇 장면들이 오버랩 되면서, 현실에 타협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의 슬픔이 연상되었습니다, 장동건의 다소 퇴폐적이면서 깊고 슬픈 눈동자도! 상해의 어두운 거리에 버려진 그들의 시신들! 그 누구보다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싸웠던 그들이지만 해방된 조국에서도 사실상 주류는커녕 냉대를 받았던 점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군요.

대련에서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할 당시 입었던 옷

<한 벌의 낡은 검은 옷으로 돌아온 이회영>
우당 이회영의 마지막 선택은 온몸을 던지는 의혈 투쟁이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괴뢰 만주국이 들어서 있던 만큼 만주는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 근거지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우당은 중국의 동북항일의용군과 함께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러 떠났습니다. 우당의 나이 이미 66세였습니다.

1932년 11월이면 만주엔 칼바람이 불겠지요. 상해 황포강을 떠난 배가 대련에 도착. 그러나 이회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체포’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대련 수상서로 끌려갔다 여순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을 자리를 향해서 치열하게 걸어갈 수 있게 한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이회영은 이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계속 뛰어넘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선이란 나라에서 그것도 이름난 정승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틀을 뛰어넘어 가장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던 이회영 선생. 그리고 이상룡, 김창숙, 김동삼, 이동녕, 이건승, 이상설 등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우당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내내 애국의 길을 걸어간 그 분들에게서 사람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군요. 그들이 간 길은 나라를 되찾는 길이면서 인간 해방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명례방 저동으로 불렸던 이회영의 집터입니다. 명동 성당 아래 일대가 다 우당의 집이었다 하네요.(현재 서울 로열 호텔과 YW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