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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6. 25. 02:31

       온달산성 -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이야기
                                                                                 
                                                                                                              주춧돌2

4-2 학기 1.문화재와 박물관
6-1학기 1.우리민족과 구강의 성립 (1)하나로 뭉친겨레 
 


1. 온달장군의 설화


서울에서 한강을 굽이굽이 따라 가다보면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충청북도로 들어가게 됩니다. 남한강을 타고 충북 단양에 도착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보온달의 전설이 어린 삼국시대의 산성 ‘온달산성’을 볼 수 있답니다.


왜, 고구려의 장군인 온달 장군의 성이  충북 단양에 있을까요?

삼국은 항상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했습니다. 삼국 중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백제는 한강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들여왔고, 강 주변의 평야를 논과 밭으로 이루게 했으며, 강을 빠른 교통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강유역을 장수왕때 고구려가  빼앗게 되는 것이죠. 

고구려는 충북 충주에 '중원 고구려비‘도 세웁니다. 장수왕이 한강지역을 정복하고 이곳이 고구려 땅임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지요. 중원 고구려비는 현재 남한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강했던 고구려가 신라 진흥왕(6세기)에게 밀리기 시작하면서 영토가 점점 줄어 들고 한강유역도 신라에게 내 주게 됩니다.

중요한 요충지인 한강을 고구려는 당연히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달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2. 울보 공주의 남편이 된 바보 온달


온달은 어떤 사람일까요?

고구려 25대 평원왕 때 일입니다.

고구려 도읍지 평양성 근처에 온달이라는 청년이 눈먼 어머니와 함께 살았답니다. 누더기 차림에 구걸하러 다니는 온달을 사람들은 “바보 온달 ”이라고 불렀습니다. 착한 온달은 화도 낼 줄 몰랐다지요.


한편,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너무나 울보였답니다.

왕은 이렇게 잘 우는 공주를 달래느라고 그렇게 계속 울면 가난하고 바보인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지요. 어느 덧 울보공주가 시집갈 때가 되자 평원왕은 공주를 상부소씨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왕의 말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며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평원왕은 펄쩍 뛰었지만 공주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화가 나서 공주를 궁궐 밖으로 쫒아냈지요. 결국 쫓겨난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습니다.


공주는 온달에게 글도 가르치고 말타기, 활쏘기를 가르쳤답니다. 바보 온달이 온달 장군으로 거듭나는 기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로부터 고구려는 삼짇날 사냥을 하여 천지신께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 삼짇날 온달은 공주가 정성껏 기른 말을 타고, 누구보다도 많이 사냥을 하여 드디어 왕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명실상부 왕의 사위로 인정도 받게 되지요.


신분의 벽이 두터웠던 고대사회지만 그나마 신분 이동이 조금은 자유로웠던 고구려이기에 그리고 어지러운 세월의 소용돌이 속이었기에 온달의 뛰어남은 평원왕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평원왕이 시대가 요구하던 참신한 영웅을 평강공주를 내세워 사위로 삼아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니었나 소설같은 추측도 해 봅니다.


3. 고구려의 재건을 위하여 - 온달산성전투


온달장군은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긴 한강 아래쪽의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땅을 찾기 위해 고구려 영양왕(26대) 1년에  신라로 출격을 합니다.

평강공주에게 “우리 땅을 되찾지 않으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요.”라고 굳은 다짐을 하고 싸움에 나섰답니다.

이리하여 신라와 접전한곳이 온달산성입니다.

 


온달산성은 해발 472m로 높지는 않으나  70도 정도의 높은 경사를 가지고 있어 방어하기에 좋은 산성입니다. 사실 이 성은 신라가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이지만 온달 장군 때문에 마치 고구려의 성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마치 왕관처럼 둘러쳐져(테뫼식 산성) 있고, 흙을 사용하지 않고 돌만을 사용하여 쌓은 석성이지요.  마치 말발굽처럼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이런 곡선 형태가 잘 무너지지 않지요.


 치열한 전투 중에 온달장군이 화살을 맞아 그만 전사를 하게 됩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관을 움직이려 했으나 관이 꿈쩍도 않았습니다. 평강공주가 와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갈라졌으니 돌아가시라“하고 말하고 나서야 관이 움직였다는군요.


온달산성을 오르는 중간에 ‘사모정’이라는 정자가 바로 온달장군의 관이 멈추었던 자리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북한에 남아 있어 보기 어렵습니다. 온달산성이 있는 단양근처는 삼국의 치열한 영토 전쟁이 있었던 곳이고 그나마 남한에서 고구려역사를 볼 수 있는 귀한 곳이랍니다.


평강공주의 사랑도 온달의 꿈도 세월 속에 가버렸지만 내려다보이는 남한강 물줄기는 오늘도 흐르고 또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