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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몰랐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이면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6. 22. 10:47

독립 운동가들이 옥살이했던 서대문 형무소

 글/하늬바람~

복원 중인 서대문 역사관에 갔습니다. 벌써 몇 달이 흘렀네요. 올 가을이면 일제 강점기 당시의 서대문 형무소를 만날 수 있겠지요? 또 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 운동가들도 더욱 생생하게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이 몇 장 없어서 충분히 소개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이제까지 잘 몰랐던 이야기들도 있으니 함께 가보실까요?

 

 ▲이미 외벽은 붉은 벽돌로 교체 중인 보안청사. 안은 아직 공사 중이네요.

보안청사 1층 창문에서 바깥을 찍었어요. 아직 공사중입니다. 공사 들어가기 전에 보안청사에 가본 사람들은 하얀 타일 건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요? 하지만 일제 때 서대문 형무소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었답니다. 지금, 1960년대에 붙인 하얀 타일을 걷어내어 1934년도의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원래의 붉은 벽돌 건물로 복원 중인 것이지요.

  ▲의왕으로 옮기기전 구 서울 구치소(서대문 형무소)의 모습. 흰 건물이 보안청사. 
 ▲뒷벽과 망루. 벽에 왜 하얀 칠을 했을까요?

하얗게 칠해져 있는 뒷벽은 1960년대에 보안청사를 하얀 타일로 바꾼 것과 관련 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우리는 반공을 국시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승만 대통령에서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던 그때. 지금이야 붉은 티셔츠를 입고 축구 거리 응원전을 펼치지만, 당시는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극도에 치달으며. 정권의 존립 이유가 반공에 있었던 터라 벽돌에 카보나이트를 덕지덕지 발랐던 것입니다. 부족한 예산에 다 하얀 타일로 바꿀 수도 없고 하얗게 하얗게 칠을!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재소자들이었을 테지요.
서대문 구치소가 의왕 서울 구치소로 이전하고 정문에 바른 카보나이트는 벗겼지만 뒷벽은 아직도 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은 감출 수가 없는 거겠지요.
 


가운데가 중앙사이고 10옥사와 11옥사 사이이거나 12옥사 사이에서 찍었습니다. 중앙사에서 연결된 모든 옥사를 다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파놉티콘 구조라고 합니다. 파놉티콘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덤이 창안했는데, 한마디로 일망감시시설이라고 할 수 있겠죠.

파놉티콘 구조는 원형 감옥의 바깥쪽에 죄수 방을 두고, 중앙에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원형공간을 둡니다. 죄수의 방에는 창문을 두고 내부를 향한 또 다른 창을 설치할 뿐 아니라 밝은 등을 설치하지요. 죄수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보기 위해서입니다. 반대로 중앙 감시탑은 항상 어둡게 하여 간수가 감시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합니다.
죄수는 언제나 일방적인 시선을 느끼게 되고 종국에는 그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됩니다. ‘규율 권력을 내면화한다.’는 말은 푸코가 한 말입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이렇듯 철저히 파놉티콘 구조로 지어진 근대 감옥임을 확인할 수 있었네요.

  ▲감옥 안임을 실감나게 하는 2층. 중앙사 쪽에서 찍은 11옥사 2층

11옥사 2층입니다. 1층에서 위를 올려다 볼 때는 참 어둡고 우중충하게 보았는데, 2층은 생각보다 밝았습니다. 그렇죠, 감시해야 하는 곳이니까? 마루 복도를 걷는 느낌은 왠지 서늘하였습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방은 그리 크지 않은데, 최대 수용 인원 12명인 방에 1910년대, 그리고 3․1운동 무렵엔 50명이 수용되었답니다. 국권을 빼앗기고 독립 운동가들이 늘어나자 그야말로 찜통 수용을 한 것이지요. 더운 날에 질식사할 정도였다니 그 고통을 뭐라 표현할 수 없겠지요.


 
 ▲중앙사 2층의 강당과 옥사로 옥사로 연결되는 복도 

중앙사 2층엔 넓은 강당도 있었습니다. 마치 교회처럼 긴 나무 의자를 쫙 두었답니다. 여기서 한 것은 정신 집체 교육이지요. 일본에 충성 운운 했을 것을 생각하니 울분이 터지는군요. 물론 독립 운동가들만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지금 모습이 다 일제 그대로는 아니라네요. 특히 지붕은 원형이 아닐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강당 역시 11, 12 옥사가 지어진 1915년에서 1916년에 지었을 것으로 봅니다.

 

  ▲환기통 새 개와 하얀 판자 세 개의 정체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11옥사 안에는 사람 몸 하나 겨우 뉠 수 있는 독방이 3개 설치된 방이 있지요. 독방의 문은 복도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창문도 없는 어두컴컴한 방입니다. 일명 징벌방이지요. 이 징벌방엔 당연히 주로 일제에 항거한 독립투사, 현대사에선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투옥되었죠. 이 방에 갇힌 이들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었습니다. 심지어 안에 넣어주는 용변기마저 허용되지 않았답니다.
하여 저 하얀 판자로 막은 곳은 바깥에서 용변기를 넣어두었던 곳입니다. 위엔 그 부분만 마룻바닥이 뚫려 있을 테지요. 벽돌로 막아 두었던 것을 허물어 보니 용변기 자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위에 문은 환기통입니다.
 

 ▲11옥사 뒤의 하얀 칠의 정체는?

역시 11옥사 뒤편입니다. 희한하게 창문 두 개 건너마다 벽돌색이 허옇습니다. 그럼, 이것도 카보나이트로 칠한 자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얀 자국이 남은 데는 화장실이 있던 자리입니다. 80년대까지도 많은 연립주택과 학교에서 위에서 버리면 “텅텅텅”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의 화장실과 쓰레기통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서대문 구치소에도 그렇게 베란다 식으로 화장실을 매달았던 것이지요. 어쨌든 냄새나는 화장실이라도 방 안에 둔 게 이동식 변기보단 난 셈일 테지요.


오늘은 형무소 답사를 조금 다른 각도로 했습니다. 복원 전의 모습도 또 하나의 역사란 의미에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오면 참 가슴이 먹먹합니다. 특히 서대문 감옥- 형무소- 구치소로 이어졌던 이곳은, 우리가 일제에 지배받고, 전쟁 후 남북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현대사를 겪어야 했기에 보통의 감옥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공작사와 사형장, 지하여감옥 등을 복원 전에 소개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기약하며 마치겠습니다.

 

※밴덤의 파놉티콘 구조 그림은 인터넷에서, 전체 전경은 찍어 놓은 게 없어서 서대문 형무소 실측 보고서에서 옮겼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