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의 현장 성균관을 찾아

글: 하늬바람~ 



2010년 9월의 성균관 대학 안에 있는 명륜당이다. 성균관 대학은 지금은 사립대학이지만 조선 시대엔 유일무이한 국립대학이었다. 그야말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

성균관의 강의동인 고풍스러운 명륜당에서 약 200여 년 전에 매우 화려한 입학식이 열렸습니다. 그 입학식의 자취를 한번 찾아보려고 오늘은 성균관 또는 문묘라 부르던 대성전과 명륜당을 찾았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순조 17년(1817) 3월 11일이었습니다. 보통 성균관의 입학식은 일 년 중 가장 해가 길다는 동지에 있는데, 꽃피는 춘삼월에 특별한 입학식이 열린 것입니다. 입학식의 주인공은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였지요. 겨우 아홉 살의 소년은 긴장하여 살짝 상기된 낯으로 문묘를 들어섰을 것입니다.

성균관 주위에 왕세자의 입학식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도 모여들었습니다. 백성들도 나라를 이끌어 갈 세자가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구경하기 위해 겹겹이 인파를 뚫고 목을 쭉 늘이고 까치발을 하는 광경이 떠오르네요.

문묘 안내도. 왕세자 입학식이 벌어졌던 장소를 이 안내판에서 찾아보길 

창경궁 홍화문을 통해 문묘 성균관으로 가는 <출궁도>


세자는 시강관(세자시강원 관리)과 유생들과 함께 성균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궁궐 문을 나오기까지는 여(작은 가마)를 탔습니다. 파란 원 안이 여를 탄 세자예요. 세자 앞에 검은색 옷(흑단령)을 입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바로 시강관들이에요, 실력 뛰어난 가정교사? 또는 세자 1인 학교 선생님들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세자 모습이 안 보인다고요? 왕의 용안이나 다음 왕이 될 세자의 모습은 그리지 않아요. 존귀하신 얼굴을 함부로 그릴 수 없었겠지요? 따라서 앞으로 6장의 어떤 그림에서도 효명세자의 모습은 숨은 그림 찾기가 될 거예요.

행렬 맨 앞의 말에는 세자를 상징하는 인을 실었으니, 이 또한 왕세자나 다름없습니다. ‘인’은 도장이에요. ‘왕세자인’, ‘효명세자인’이라고 새겨진 도장을 사용했다지요. 그 주위에 의장을 들고 가는 이들은 세자익위사 관원들인데 언제 어디서나 세자를 철통같이 지켰죠. 이들 세자익위사나 시강관들은 어린아이 우물가에 내놓는 심정으로 세자를 옆에서 보좌했겠죠?


입학례의 첫 절차로 공자에게 술을 올리는 의식을 그린 <작헌도>. 공자를 문성왕(당나라 현종 때)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공자의 사당이니 문선왕묘, 또 공자를 ‘대성’이라고 하니 대성전이 되는 것이다.

어느새 효명세자를 태운 연은 문묘 대성전 앞에 도착했습니다. 입었던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고 세자는 유생들이 입던 학생복(교복, 청금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젠 학생으로서 예를 갖추겠다는 것이지요. 동쪽 문에서부터 세자가 간 길은 노란색으로 그려져 있어요. 붉은 상위에 손 씻는 물 단지도 있네요.

세자는 이곳에서 공자와 네 성인에게 술을 올리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누구나 명륜당에 가기 전 이곳에 배향을 해야 합니다. 공자 신위는 가운데, 동과 서쪽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신위가 있어서 각각에 술을 올리고 절을 하였습니다. 대성전 익실에서는 공자의 제자인 10인과 송나라 성리학자 6인 합하여 16인의 신위에 성균관 유생들이 배향했음을 보여주네요.
효명세자는 어디 있을까요? 가운데 노란 돗자리 다섯 개가 바로 효명세자가 절했던 곳이에요.

태조 7년에 지었다는 대성전. 임진왜란때 불에 타 선조때 다시 지었고, 고종때에도 크게 수리했다. 중앙에 공자와 그 제자 4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왕복도>
이날 세자를 가르친 박사는 남공철(홍문관 책임자)이었다. 홍단령을 입은 스승이 동쪽에 서 있다.

여기는 명륜당 안팎입니다. 동쪽 문 밖엔 세자익위사와 시강원 관리들이 대기하고 있어요. 효명세자는 장명자(스승과 세자 사이에 말을 전달하는 유생)를 통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러면 성균관 입학례의 일일 스승인 박사는 덕이 부족하다며 사양하고, 이러기를 세 차례 반복하여 드디어 세자는 스승을 뵈러 들어가게 됩니다. 
이날은 아무리 세자라도 여기선 학생일 뿐이라 스승인 박사는 동쪽에 서고 세자는 서쪽에 서게 되지요.

폐백’ 하면 혼인할 때 시부모에게 올리는 음식과 절을 떠올린다. 그것만이 아니라 임금이나 신에게, 또 윗사람에 올리는 선물도 폐백이라 한다. 세자가 스승에게 폐백을 올리는 <수폐도>

수폐도의 월대 계단이 지금의 명륜당과 좀 다른가요? 지금은 가운데 계단만 보이는데, 동쪽으로 스승이 올라가 서 있고 세자는 두 번 절을 올린다네요. 물론 집사자들을 통해 모시 3필, 술과 육포를 스승에게 바치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스승도 두 번 답절을 하였습니다. 이어 세자는 명륜당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서쪽에 둘러쳐 놓은 편차(천막)에 들어가 잠시 쉰 다음 공부를 하러 명륜당 안으로 들어갔지요.

 

효명세자가 이날의 스승인 박사 남공철에게 수업을 받는 <입학도>. 스승은 어느새 옷을 흑단령으로 갈아입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일까요? 스승은 동쪽에 자리 잡고 학생인 효명세자는 서쪽에 엎드려 있어요. 노란 자리가 효명세자가 앉은 자리입니다. 스승 앞에는 책상도 있는데, 세자 앞엔 책상도 없고 책만 펼쳐져 있습니다. 이렇게 왕세자라 하더라도 성균관에서는 일개 학생에 불과하다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네요. 비록 세자라 할지라도 명륜당에선 엎드려 공부를 했습니다. 인조나 효종처럼 이것을 뒤집어보려던 왕들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효명세자가 이날 공부했던 책은 《소학》의 첫머리(題辭)였는데 《순조실록》에 그날의 문답이 남아 있습니다. 세자는 “오직 성인(聖人)만이 천성을 온전히 보존한 자이다(惟聖性者).”란 대목에 이르러,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합니다. 과연 똑똑하고 현명한 세자라는 소리를 들을 법합니다. 이제 겨우 9살인데 성인 운운 하니 말입니다.
뜰에는 도포(청금복)를 입은 유생들이 바른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럼, 모든 왕세자들이 다 《소학》을 공부했을까요? 《대학》의 일부의 음과 뜻을 외웠던 예도 있어요. 소현세자(14살)와 효종(27살), 현종(12살)이 그들입니다. 인조반정으로 늦은 나이에 입학례를 치렀으니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8,9살의 어린 나이에 입학하는 세자들에겐《대학》은 동화를 읽어야 할 아이에게 소설의 의미를 새겨 보라고 하는 것과 같겠지요.

중종 때 심었다는 명륜당 뜰의 은행나무. 입학도에도 그려져 있다. 

 

창경궁 시민당은 세자가 서연을 하던 곳. 입학을 무사히 마친 효명세자가 시민당에서 2품 이상 문무관과 종친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수하도>

시민당의 주인인 효명세자는 이제 동쪽에 앉았습니다. 세자 둘레에 익위사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습니다. 종친들과 2품 이상의 문무관리들이 절을 하고 답절을 하는 의식이 거행되는데, 신하들이 올리는 치사를 들을 때는 모두 꿇어앉아 들었다고 합니다.

마당에도 종3품 이하의 관원들이 앉아 축하하고 있고, 익위사 관리들이 의장과 깃발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와 연이 한 줄로 놓여 있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날씨도 화창한 봄날이었는지 상서로운 구름이 시민당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효명세자를 비롯하여 왕세자들은 입학례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럼, 이날 이후 효명세자는 성균관에 잘 다녔을까요? 입학례는 이제 세자가 학문에 본격적으로 정진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통과의례일 뿐이었습니다. 즉, 그 이후엔 성균관에 가지 않았지요. 세자가 공부하던 진짜 세자의 학교는 춘방(春坊)이었습니다. 그러니, 왕세자는 성균관의 학생이면서, 동시에 가짜(?) 유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입학도첩의 주인공 효명세자, 그의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수천 명의 백성들이 구경했다는 효명세자의 입학식. 그로부터 꼬박 10년 뒤인 1827년(순조 27년)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해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안동 김씨의 세도로부터 벗어나는 것?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

궁중 잔치의 춤과 노래의 가사를 직접 지을 정도로 문화 예술에도 관심과 재능이 있었으며, 할아버지 정조를 본받아 강건한 정치를 하고자 했고, 뛰어난 자질을 겸비하기도 했다던 세자. 그러나 그 앞에 일찍 찾아온 것은 죽음(1830)이었지요. 효명세자가 독서하였던 창덕궁 의두합에 서면 따뜻한 남쪽을 마다하고 북향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던 그의 꿈과 죽음이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성군의 꿈은 그저 입학도첩에만 남아 있네요.


이 글은 <왕세자의 입학식>( 김문식, 문학동네)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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