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선종의 스승 도의선사의 자취

글: 하늬바람~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된 진전사 터에 자리한 삼층석탑(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에서는 뻐꾹새 소리도 깊었다>
진전사지 탑,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설악산과 양양을 방문하여도 진전사지는 비껴가게 되더군요. 아무래도 여기는 혼자 가라는 뜻인가. 그러던 차에 우연한 양양 행.

낙산사 앞에서 해안도로를 벗어나 강현면 마을길로 시오리쯤 가니 깊고 좁은 계곡을 끼고 소박한 둔전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지 삼층석탑 거의 코앞까지 펜션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더군요.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있는 동안 석탑을 보려고 온 이는 아버지와 함께 온 아들 둘이 전부였으니, 숲 속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소리는 적막함으로 참으로 깊었습니다.

계단을 한 층씩 올라설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탑신. 단풍나무 휘어진 가지 사이로 말간 낯빛을 지닌 처녀 같은 삼층석탑이 슬쩍 웃음을 베어 물고 있습니다. 다시, 구애하듯 뻐꾸기 소리가 청아하게 지나갑니다.


진전사지 계곡. 1200여 년 전 도의선사도 이 골짜기 길을 걸었으리라.

<진전사에 도의선사가 깃들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진전사는 통일신라 말에 세워진 사찰입니다. 터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와 이름을 알 수 있었지요. 건립 연도를 9세기 초로 추정하는 것은 도의 선사가 이곳에서 선종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도의선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때가 821년(헌덕왕 13년). 신라는 아직 교종 일색이었지요. 최치원의 표현을 빌자면, 도의선사는 교종의 단점을 감싸려 했지만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鵬) 새가 남쪽바다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이’ 도의선사가 하는 말을 마귀의 말이라고 비웃었다지요. 하여 도의선사는 서라벌을 떠나 설악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진전사에 깃들게 된 것입니다.

진전사가 도의선사를 품었는지 도의가 진전사를 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절집에서 염거화상과 일연 스님이 배움을 얻었다 하니 한국 선종 사상 의미가 큰 절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선종 사찰에 조성된 전형적인 9세기 석탑의 하나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탑 양식이 빛나네>
신라 탑은 통일신라 이후엔 3층탑이 많습니다. 백제 탑이 기단이 좁고 낮은 데에 비해 신라 탑은 기단이 넓고 2층 기단 중 상층 기단은 마치 탑신인 것처럼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기단에는 목조 건물의 기둥도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계단식 받침이 있어 서까래가 화려하고 깊이가 있으며 날아갈 듯 상승감도 선사해 줍니다. 신라 탑의 전형인 불국사 석가탑을 떠올려보면 신라 탑 양식의 특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시대의 문화도 그 사회와 더불어 변화합니다. 스스로 운동하고 발전 즉, 변화하는 모든 사물에 영원한 것은 없지요. 황룡사 9층 목탑, 7세기의 감은사지 탑, 8세기의 석가탑 그리고 여기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견주어만 봐도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높이가 작아졌으니 장중한 맛이 덜한 것이 큰 변화일까요? 주위를 압도하는 느낌은 감은사지 탑이 최고이고, 석가탑은 완벽한 비례미로 존재의 위엄을 높입니다. 그러나 5미터로 준 진전사지 탑은 말간 민낯의 처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삼층탑의 서쪽 면

<팔부신중 부조가 아름다운 탑>
국보 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삼층탑은 기단과 1층 몸돌에 돋을새김한 장식이 아름답습니다. 맨 아래 하층기단에는 천인이 조각되어 있습니다만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 안타깝더군요. 모두 비천상이 여덟입니다.

상층 기단에는 동서남북 둘씩 팔부신중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석굴암 전실의 팔부신중은 모두 서 있는데, 이곳의 팔부신중은 구름 위에 앉아 있습니다. 언제든 부처의 부름을 받고 날아갈 차비를 하고 있는 걸까요?

이들 팔부신중은 불교의 발전과 함께한 무사들이지요. 처음엔 고대 인도의 신들이었지만 뒤에 부처의 깨달음에 감화 받아 불법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까요. 역시 1층 몸돌에 사방으로 여래 네 분이 그윽이 앉아 계십니다. 마치 팔부신중의 호위에 안심하고 중생을 굽어보는 듯합니다. 동서남북 각각 약사여래, 아미타불,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이 앉아계신데 그 모습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신라 말 탑에 팔부신중을 조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하다. 8개로 나뉜 면석을 채우기 위한 양식적인 이유라는 주장과 1층 몸돌의 사리를 지키려는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안타깝게도 얼굴이 뭉개진 진전사지의 석탑 아수라와 운문사 삼층탑의 아수라(사진:문화재청)

탑 남쪽 면에 새겨진 아수라는 누구나 잘 아는 신입니다. 수라(Sura)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아(a)는 부정하는 접두사이니까 결국 나쁜 신인 셈입니다. 하지만 아수라가 처음부터 나쁜 건 아니었지요. 본래는 착하디착하였는데 제석천이 자신의 딸을 농락하자 화가 나서 하늘나라를 공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아수라에게는 미녀는 많은데 맛있는 음식이 없고 반대로 제석천에게는 맛있는 음식은 많은데 미녀가 없어서 서로의 것을 빼앗으려고 왕왕 싸우게 되었다지요. 그런데 그 소리가 요란하거니와 몹시 처참하여서 ‘아수라장’이란 말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석탑 기단에 팔부신중을 새겨 넣는 것이 신라 말 고려 초의 유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운문사의 탑에도, 선원사지의 탑에도, 고려 초의 것으로 여겨지는 보원사지의 탑에도 팔부신중들이 참으로 인간적인 표정으로 새겨져 있으니까요. 모습도 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글쎄요, 가장 인간적이다 못해 익살스럽기까지 한 것으로는 운문사 팔부신중이 아닐까 싶네요.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부도.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한다.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 대개 9세기경에 스승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선종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도의선사 부도를 찾아서>
삼층석탑을 대면한 벅찬 감회를 안고 도의선사 부도를 찾아 올라갔습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부도가 있어서 놀라고, 산중턱이라고 할 만한 곳에 저수지가 펼쳐져서 놀라고, 새로 지어진 진전사가 나타나서 놀랐습니다.

도의선사의 부도라고 추정하는 부도는 나말여초의 다른 부도와 달랐습니다. 탑과 팔각원당형 부도의 조합이라고나 할까요? 연꽃받침대가 아닌 석탑과 같은 2층 기단 위에 8각당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특별한 장식도 없어서 엄숙하기도 합니다. 부도인가 싶으면 탑 같고, 탑인가 싶으면 부도입니다.

도의선사 입적 후 선사의 죽음에 대한 예를 어떻게 취할까 논란이 있었을 터,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조성했듯이 그와 같은 마음으로 부도를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고민의 반영이 탑 같은 부도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과연, 부도의 시작이라 할 만합니다.

천 년을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승탑을 보니, 도의선사의 의로운 뜻이 돌만큼이 무겁게 전달되는군요. 솔숲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부도에 도의선사가 어떤 분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서쪽에서 바라본 부도

<신라의 미래를 예견한 도의선사>
하대 신라는 한여름 달걀처럼 부패하고 있었습니다. 당에서 돌아오니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 때(821년)였지요. 그 뒤로도 목숨을 담보로 하는 왕위다툼은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권력을 가진 왕과 귀족과 지배층을 옹호하는 불교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선종, 그중에서도 남종선을 익히고 돌아온 도의는 “타고난 마음이 곡 부처”이니 경전에 앞서 본연의 마음을 알라고 외쳤습니다. 아니, 왕만 부처가 아니고 우리 같은 무지렁이도 본연의 마음을 닦으면 부처가 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한 번 터진 물꼬를 쉽게 막을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변혁을 원하는 이들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상은 시대의 반영. 언제나 불온한 법.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예고하기 때문이지요.

도의선사를 당대의 혁명가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남선종에 내포된 평등사상 ․ 변혁 사상은 호족의 성장을 불러 왔고 선종을 수용한 호족들은 새 나라를 열었으니, 도의가 이미 신라의 운명을 예견하였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도의선사 부도 옆 넓은 터에 새로 지은 진전사. 올라올 때는 좁은 계곡이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설악의 품은 깊고도 넓었다.

<절은 사라지고 스승은 영원하네>
도의선사는 설악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지만 그의 사상은 결코 진전사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염거화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염거의 제자 보조(普照) 체징(體澄)은 가지산사(迦智山寺)로 들어가 9산 선문 중 가지산파를 열었기 때문이지요. 그 가지산사가 보림사(寶林寺)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지사문의 선종이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가 되었음을 볼 때, 한국 불교의 시원은 저 설악 깊은 골짜기 진전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전사는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폐사되었다고 하지요. 대체로 16세기경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도적떼의 소행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터 위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지고 떠났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 있던 진전사가 2005년 복원되어 선종의 근원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습니다. 옛 진전사 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고요.

본연에 대한 성찰이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 것을 믿었던 도의선사의 가르침은 지금 우리에게도 소중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하며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뒤로 하고 내려옵니다. 여전히 뻐꾹새 소리는 맑고 깊게 들리고……. 절은 사라졌지만 스승은 영원합니다. 천 년을 넘게 버텨온 삼층석탑의 아름다운 사방불과 팔부신중이 내 마음에도 돋을새김 되어, 가고 또 가고 싶은 곳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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