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영남대로’ 옛길 - 토끼비리

                                                 글 • 하늬바람~


드높되 사납지 않은 산줄기가 이어지는 문경, 골짜기마다 9월 햇살 아래 이제 막 익어가는 벼들은 초록과 노랑을 머금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달리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그 풍경이 가슴까지 슥 들어오는 길은 걸어 보아야 예의가 아닐까.

하여 오늘은, 한양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 하면 흔히 문경 새재를 떠올리지만, 옛길 가운데 토끼비리 길을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토끼비리는 새재에서 한 10킬로미터 아래쪽에 가은천과 조령천이 만나 영강이 되어 휘돌아 흐르는 지점의 진남교반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 고모산성과 석현성을 지나가는 영남대로의 옛길입니다.



고모산성 주차장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뒷산 같은 분위기. 역시 몇 걸음 떼자 성황당이 보입니다. 시원스럽게 활짝 가지를 벌린 느티나무 모습이 나름 신목으로서 신령스러움을 보태어 주네요.
석현(石峴)은 우리말로 돌고개이니 고갯마루에 성황당이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으나 성문에서 아주 가까이 자리한 게 좀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너무 멀리 찍었나요? 현판이 보이지 않지만 석현성으로 들어가는 진남문의 모습입니다. 석현성 진남루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뒤에 만들어진 관성으로 19세기 말의 축성술과 건축술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1893년 문경 부사인 김정근(金楨根)이 신축하였다는군요. 하지만 지금은 1896년 의병장 이강년이 일본군과 이곳에서 전투를 치르며 다 불탄 것을 새롭게 복원하고 있습니다. 

아직 복원 중인 현장을 보면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시멘트를 척척, 지자체들이 복원의 진정한 뜻을 새겨 주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바깥에서 진남문을 바라보며, 왼편으로 신라가 쌓았다는 고모산성으로 이어지고, 오른편으로는 토끼비리로 연결됩니다.

어떤 길일까? 조심조심 성벽을 끼고 갑니다.

토끼비리는 토끼 兎에 옮길 遷을 써 ‘토천’또는 관갑천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비리’는 경상도 사투리로 ‘벼루’라고 하는데 낭떠러지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그러니 토끼가 지나다닐 만한 낭떠러지 길이라는 말이겠지요. 걷다가 문득 시선을 강 쪽으로 돌리면 60~70도는 될 것 같은 비탈길이 공포를 몰고 옵니다.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왕건이 남쪽을 치러 내려올 때 옛길을 따라 진군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길이 사라지고 낭떠러지 아래는 영강이 굽이쳐 흘렀지요. 길을 잡지 못하여 갈팡질팡하던 차에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내려가며 길을 안내해 주어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는 전설입니다.




그냥 여느 산길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왼편은 내려다보면 발 헛디딜까 무서운 낭떠러지입니다. 이 좁은 길에 도토리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천천히 걸으라고 발길을 붙잡습니다. 아예 허리 굽혀 줍게 되더군요.

인적은 드물어 오직 나만의 세상 같았습니다.


이 길이 영남대로라네요. 과거 보러 가는 조선 선비들은 토끼비리 길을 지나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갔지요.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가 흐르는 조선의 동맥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잊힌 길의 ‘현재’를 보는 듯해 왠지 마음이 아립니다. 사실 2007년 12월에 길로는 처음으로 명승 유적으로 지정됐다는데 지금은 아무도 걷지 않아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집이든 길이든 사람 손길 발길 타지 않으면 그 존재는 사라지는 법이지요.

다만 하도 많은 이들이 걸어 다녀 반질반질해진 바위길이 한때는 마차도 지나다녔다는 옛날의 영화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래도 잠시 동안이지만 오래 전 신라 때부터 이 길을 걸어 다녔을 많은 사람들과 시공간을 같이 하고 있는 느낌, 그 느낌은 가을 햇살만큼이나 따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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