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동무삼아 걷다 남한강 물길에서 만난 여강 사람들

 글:하늬바람~


계단을 오르면 정말 달을 맞이할 만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오르는 길에 잠시 숨 돌리며 마음속 소원을 풀어볼 창리와 하리의 삼층석탑. 저래 뵈도 보물(제91, 92호)로 지정되었다.

<영월루에서 바라본 여강, 천지가 무한하다>
신륵사에서 강 건너를 바라보면 마암 바위 위에 누각 하나가 정취 있게 서 있습니다.  마암 바위에서 용마가 나와 사람들을 괴롭히자 나옹 선사가 신비한 굴레를 씌워 그 말을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지요. 여주읍 상리에 자리 잡은 그 누각은 영월루입니다. 18세기 말에 지은 이 누각은 본래는 군청의 정문으로 쓰였는데 1925년 군청을 옮기며 군수가 이곳에 옮겨 놓았다지요. 그 군수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눈을 가졌네요.
‘영월루(迎月樓)’에서 잔잔한 여강에 비친 산 그림자를 내려다보니, 보름날 밤 둥근 달이 강물에 비칠 그 아름다운 정경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한쪽에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창리 ․ 하리 삼층석탑은 영월루의 다정한 마음입니다. 비록 둔탁하고 상승미가 부족한 고려 후반기의 탑이지만 시골 아낙 같은 넉넉하고 정감어린 탑이었습니다.


지난 10월 15일에는 저 공사가 끝나 준공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축하했을까?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은모래 금모래가 반짝였을 강변에 갈대의 노래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바람에 서걱대는 웅성거림, 낮은 생명의 노래가 끊기고 강천보 공사 현장에서 들리는 기계음이 웅웅거릴 뿐. 올 10월말이면 끝난다는 4대강 사업의 현장이었습니다.
번듯한 홍보관과 전망대, 홍수 조절을 위해 만든다는 강천보, 잘 포장된 자전거 도로, 그 제방 길에 흙 흘러내리지 말라고 발라놓은 시멘트 사방공사. 이 모든 것이 말없이 흐르는 저 남한강을 위한 일일까요? 시간이 지나 나무도 보기 좋게 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 캠핑장을 이용하게 되면 그땐 공사하게 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날이 올 거라는, 위로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은 그만둡시다. 분명 이 사업은 말 그대로
돈벌이 사업뿐이죠. 22조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이익을 얼마나 남길지 알 수 없는……. 그 와중에 계속 제기될 환경문제는 접어두고, 남한강이 품은 무수한 생명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습니다.
그 강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의 고마움과 기억과 자긍심은 외지의 거대 자본에 점점 희미해져 가겠지요. “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는 신경림의 노래는 우이독경.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니 입 다물고 있으라는 이 정부의 오만에 화가 납니다.

자전거와 걷는 이들을 위해 잘 닦아 놓은 제방길. 우리가 원하는 길이 이런 길인가, 묻게 된다.


이색은 여강미회(驪江迷懷)에서 “驪江一曲 山如畵 여강 한 구비, 산은 마치 그림 같은데/ 半似丹靑 半似詩 절반은 단청그림, 또 절반은 시 같구나.” 하고 노래하였다. 나루터 풍경이 그림이고 시였다.

<산 그림자 어린 브라우 나루가 그림 같고 시 같다>
브라우 나루터는 넓지 않았습니다. 여주읍 단현리와 건너편 강천면을 이어주던 나루. 지척의 조포나루가 한양을 오가는 황포돛배를 대던 곳이라면 브라우 나루는 그저 강 건너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던 나루였던 것이지요. 여주장이 서면 강천면 사람들은 장을 보기 위해 배를 대었습니다. 때로는 소장수들이 원주에서 소를 구입하여 브라우 나루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단현리 사람들은 강천으로 가 땔나무를 해서 실어 오기도 했고요. 마을에서 고용한 뱃사공이 따로 있어서 품삯을 걷어 주었는데, 강천 가야리 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했을까요 , 그들이 보리와 쌀을 걷어 주었다고 합니다.
꼭 외국말 같은 ‘브라우’는 ‘붉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는군요. 나루터 바로 위는 바위투성이 고개가 있었는데 그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띠어서 브라우가 된 것이지요. ‘단암(丹嵓)’ 각자가 새겨진 바위도 있었는데, 그 위에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민진원이 90칸 집과 정자 침석정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인현왕후의 오라비였던 민진원. 이곳에서 가까운 능현리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는 곳이니 일대가 민씨 집성촌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나루터 주변 집들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는데, 용케 나이든 느티나무가 아직도 꿋꿋이 나루를 지키고 있습니다. 조그만 나루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여강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그늘삼아 등대삼아 오갔겠지요.

멀리 보이는 다리는 남한강대교. 영동고속도로이다.

  <흔암리 나루터 가는 길>

여강 길은 때로는 사람 발길 닿지 않는 산길
황금들판과 함께 하는 길
들깨 터는 소리 들리는 마을길
길들이 굽이굽이 하늘로 강으로 사라지는 길

구름 흩어진 맑은 얼굴의 하늘이 말한다.
하늘과 땅을 품어버린 강물도 말한다.
우리 모두 한 줄기 바람이어도 좋다.
바람처럼 생각이 흩어져 길 위로 달아나고

그저 온 천지가 말없이 웃는 여강길이다.

 

흔암리의 다른 이름이 백암(白巖). 이곳의 바위는 흰빛을 띠었다. 과연 마을 앞에 크고 흰 바위가 있었는데 그걸 인근 김 참판이 상석으로 쓰려고 채석해 가지고 가 비를 세웠다 해서 흰암, 흔암이 되었다.

<청동기 시대 마을이 있었던 흔암리 나루>
들길 지나 흔암리 뒷산 길 넘어 흔암리에 도착했습니다. 이 마을에 강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해발 123미터의 낮은 산이 있는데 그 구릉에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요. 서울대 박물관에 발굴 유물과 내용이 전시되어 있어 언제 한 번 가 보리라 마음먹었는데 오늘 오게 되었네요.
집들은 모두 16채가 발굴되었지만 일부만 복원해 놓았습니다. 산기슭을 니은(ㄴ)자 모양으로 파서 지은 집. 방형 집도 있습니다. 출토된 것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돌화살촉의 모양이나 토기를 볼 때 이 지역은 동북지역과 팽이형토기가 주로 나왔던 서북지역의 영향이 교차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흔암리 유적 출토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탄화 쌀이지요. 12호와 14호 집터에서 불에 탄 쌀, 조, 보리, 수수가 나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오곡 농사를 지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으로는 무려 기원전 16세기, 유물 비교로는 기원전 7세기라 하니 가장 이른 시기에 쌀농사를 지었다는 얘기입니다.
흔암리 선사 유적 바로 옆엔 흔암 마을 집들이 지붕을 마주대고 있고 마을회관 옆으론 누렇게 익은 벼들이 물결치고 있습니다. 버스도 하루 몇 차례 들어오지 않는 오지마을이나 아직도 쌀농사를 이어가고 있는 마을. 선사시대 사람들의 숨결이 나직이 들리는 정겨운 마을이었습니다.

 

고려말 종형 부도의 정형. 보제존자 나옹 선사의 사리탑이다.

<여강가에 자리한 천년 고찰, 신륵사>
가을볕 동무삼아 이호 ․ 브라우 ․ 우만 ․ 흔암 나루를 지나 걸었던 여강길은 아쉽게 아홉사리를 넘지 못한 채 마쳤습니다. 그리고 여강길은 며칠 뒤 신륵사로 이어졌지요. 신륵사에서 입적한 보제존자 나옹 선사를 만나러 가는 길. 늘 그렇듯 신륵사 뒤편 솔숲에 세워진 나옹의 부도는 800여 년의 돌이끼를 머금고 위엄 있게 서 있었습니다.
1층의 단은 매우 넓습니다. 문득 금산사 적멸보궁 뒤 방형계단이 떠올랐습니다. 계단은 계를 주거나 계를 설파할 때 사용하던 단이지요. 그러나 금산사 방등계단과 종형사리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것이지만 이곳 아담한 계단 위 석종형 부도는 나옹 선사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라는 게 다릅니다.
나옹 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하고 3년이 지난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세운 부도는 고려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불꽃 모양의 보주를 올려 단순한 탑신에 변화를 주었네요. 솔바람 소리마저 숨죽이는 묘탑에 올라오면 화려하게 조각한 납석 화사석을 갖춘 석등과 이색이 쓴 탑비까지 온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나옹의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조사당 안 왼쪽이 무학, 가운데가 지공, 오른쪽이 나옹 화상

<나옹이 양주 회암사를 떠난 까닭은?>
나옹은 고려의 선승. 조선 건국에 일조한 무학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를 왕사로 삼았던 이는 공민왕이었지요. 나옹선사와 공민왕 사이에 얼마만한 믿음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옹은 타락한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불씨를 지펴 희망을 일구려 했습니다. 나옹은 적극 현실을 바로잡고 실천하는 선으로 진리를 추구했지요. 한마디로 ‘실천하는 지성’이었던 셈. 하지만 그의 바람은 공민왕의 죽음과 더불어 위기를 맞았겠지요. 그를 따르는 무리가 점점 늘어나자 양주 회암사에 더 있지 못하게 하고 멀리 밀양 영원사까지 쫓아낸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요?
병들어 걷기도 힘들었던 나옹은 신륵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마치 그가 남긴 시 ‘청산혜요아(靑山兮要我)’와 같은 죽음이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如水如風而終我)

 

벽돌로 쌓은 전탑. 보물 226호이다.

<배로 들어가던 신륵사, 등대가 되어 주던 신륵사 전탑>
지금은 ‘봉미산 신륵사’ 현판을 단 일주문이 있어 문을 지나 신륵사 경내를 들어갑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어땠을까요? 언제까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강변에 배를 대고 구룡루를 지나 극락보전에 들어갔다니 흥미롭습니다. 신륵사 오른편으로 한강의 4대 나루인 조포나루가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등대 역할을 했던 것은 다층전탑이겠지요. 동남쪽 바위 위에 우뚝 서 있어 이 전탑을 보고 절을 찾아 왔을 법합니다. 영조 때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이 본래 그대로는 아니지만 고려시대의 전탑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벽돌 둘레에 연주문(連珠文)이 보이고 당초문을 돋을새김한 반원문이 눈에 띄는데, 이 문양을 보아 고려의 탑으로 추정하는 것이지요. 화강암 장대석으로 4단 7층의 기단을 쌓아서인지 벽돌로 쌓은 탑신이 더욱 높게만 보입니다.

황포돛배 타고 오르내리던 여강 사람들. 그들의 안녕을 이 탑은 말없이 빌었으리라 그리 생각되네요. 그리고 나도 소원을 빌어 봅니다. 나옹선사의 말처럼, 사랑도 미움도 여강 물에 벗어놓고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돌아올 수 있을까.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