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문화 · 유적 알기 - 중국

 

강철 같은 여인과 이화원

 

참세상 

이화원(頤和園)은 중국 청나라 황제의 유명한 정원 중 하나입니다. 황제의 정원이던 이화원은 강철보다 강한 여인으로 황제와 같은 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西太后)와는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곤명호에서 바라본 이화원 전경



이곳의 본래 이름은 ‘청의원’이었는데 1860년 유럽의 강대국이 중국을 침략하였을 때, 유럽 군대에 의해 불타버렸어요. 그랬던 곳을 서태후가 다시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화원이라 이름 지었고, 서태후 자신은 인공호수 곤명호(昆明湖)에서 뱃놀이를 즐겼어요. 서태후는 죽을 때까지 이화원에 머무르며 나라를 다스렸답니다.

이화원 경내 건물

이화원 회랑














 

이화원은 인공 호수 곤명호를 끼고 조성된 정원입니다. 이곳에는 가장 길다는 728m의 회랑이 설치되어 있어서 사시사철 넓은 곤명호를 마음껏 볼 수 있었죠

그러나 이화원은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달리 혼란스러운 정치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어요. 서태후가 이화원에서 사실상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아니지만 실제로는 그녀는 죽을 때까지 황제에 버금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강한 여성이었어요.


이화원으로 행차하는 서태후


그녀는 17살 때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갔어요. 서태후는 노래와 춤을 잘해서 황제가 반하게 되었어요. 서태후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황태자를 낳아 황후 다음의 자리인 귀비에 오르게 됩니다. 궁녀에서 귀비로 신분이 상승되었지만 그녀의 권력욕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황제의 뒤를 이어 6살인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지 그가 바로 동치제이었어요. 그녀는 황제의 생모로서 태후가 되었고 궁궐의 서쪽 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태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서태후는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정치를 하며 권력을 틀어쥐었습니다.

그런데 동치제가 젊은 나이에 아들 없이 죽자, 서태후는 이번엔 자신 여동생의 아들을 황제로 세우게 되죠. 그가 광서제인데 서태후는 어린 조카를 대신해 정치를 맡아 하며 절대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운의 황제, 광서제

광서제는 어른이 되면서 이모인 서태후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황제는 중국을 강하고 개방된 나라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러나 서태후는 옛날의 정치와 중국 문화를 유지하고 싶어 한 것이죠. 두 사람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깊어갔습니다. 결국 광서제는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변법이라고 불리는 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태후의 명령을 받은 청나라 장군들과 개혁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황제의 개혁정치는 103일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이화원의 옥란당에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되고 되었죠. 개혁에 실패한 청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서태후는 평소 이화원의 긴 복도를 산책을 하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화원을 거닐면서 서태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녀의 마음은 잔잔한 곤명호처럼 편안했을까요?

 파란만장한 서태후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이화원의 봄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