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속의 한국근대사>


'검은 배'를 타고 온 하얀 미국-일본의 개항

                                         

                                                                                   글:봄뫼


‘검은 배’, 흑선의 등장


1853년  초여름 어느 날 일본의 에도(江戶·현재의 도쿄) 만 우라가 항에는 이제껏 일본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시커멓고 배 4척이 연기를 뿜으며 나타났습니다.

   △1853년 우라가항의 페리함대 -일본인들은  ‘검은 배(구로후네)’라고 불렀습니다. 
시 일본 배는 기껏해야 100~200톤 정도였는데 그 배는 2450톤 정도나 되는 큰 배였지요. 바로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이끄는 기함이었습니다. 이 배는 증기선으로, 목재가 썩지 않게 콜타르칠을 해 검게 보였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이 배를 ‘흑선’(구로후네)이라고 불렀지요 .
                                                                           △당시 일본인들이 본 '흑선' 

이 배의 등장 이후 일본의 역사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답니다. 또한 우리 역사도요.

이름도 불길한 이 ‘흑선’들은 1852년  반드시 일본을  개항시키라는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페리 제독이 이끄는 통상사절단이었어요.
 

전통적으로 쇄국정책을 취하던 일본은 개항을 요구하는 미국의 국서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일본 정부가 받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것을 전달하겠다는 페리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받을 수 밖에 없었지요. 

 



 









    
 △ 매튜 페리의 사진과 일본의 우키요에 

 국서를 전한 페리는  ‘1년 후 다시 올 때까지’ 개국을 할 지 안할 지 결정하라면서 일본을 떠났습니다. 결정하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봐야죠. 미국의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으로 전쟁을 일으킬 테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으니까요. 
 

다음 해인 1854년 2월 페리는 이번에는 함선 8척을 이끌고 다시 에도 만에 나타났어요. 마침내 200년 동안 닫혔던  일본의 문을 연 것입니다.  페리는 도쿠가와 막부와  ‘미일 화친조약’을 맺어 미국 함선이 시모다와 하코다테에서 석탄과 음식과 물을 얻고, 시모다에 미국 영사가 머물 수 있게 했습니다.

          △1854년 3월 8일 페리는 요코하마 항구에 상륙했습니다. 

또한 1858년에는 그 유명한 불평등 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 조약의 가장 불평등한 내용은 치외법권과 협정세율이었어요.

치외법권은 일본에 머무는 미국인이 지은 죄를 재판할 때 일본법에 따르지 않고 미국 영사관이 재판권을 갖는 것입니다. 협정세율은 외국에서 일본으로 수입되는 물품에  일본정부가 자유로이 세금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협의해서 세금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불평등조약을 연이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사이에도 맺어야 했어요. 

그런데 이 내용, 어딘가 낯익지 않나요?
이후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에서 우리나라에게 자신들이 당한 이 불평등 조항을 고스란히 써먹은 것입니다.
 

고래도 잡고 중국으로 가는 길

                                    △19세기 미국의 고래잡이배가 귀신고래를 잡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왜 굳이 일본을 개항시켜야 했을까요?


미국은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조선업, 무역업, 어업이 발달했습니다.

미국의 고래잡이는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활발했어요. 그런데 19C 초 산업의 발전과 함께 고래 기름이 더욱 많이 필요졌고 미국의 고래잡이 어업은 아주 빠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700척이 넘는 고래잡이배가 온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돌아다녔지요.  

그 중 북부 태평양은 고래가 가장 많이 잡히는 바다였던 만큼  수십 척에 달하는 미국 배가 고래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역에서도 18세기 말 중국 광둥성에서 차와 비단을 사는 외국 배들 중 1/3이 미국 배였어요. 미국 입장에서 청나라는  앞으로 미국의 상품을 많이 팔 수 있는 시장이었습니다.

△1850년대 홍콩항에는 각국의 배가 드나들었습니다. 그 중 미국의 배도 외륜증기선을 포함해 3척이나 보입니다.

때문에 미국은 19세기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횡단해 유럽과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세계일주 항로를 완성하게 되는데 이 태평양 항로를 안전하게 이용하고 태평양에서의 고래잡이를 위해 중간에 연료와 물, 물자를  채울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어요.  그런 점에서 일본의 항구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무너진 쇄국정책, 흔들리는 막부


  1861년 요코하마에 도착한 ‘서양 5개국’-미국에 뒤를 이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이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개항과정에서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세력에 대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1639년부터  정권을 유지했던 도쿠가와 막부는 개항을 계기로 권위를 잃고  일본 사회는 모든 부분에서 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지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이루게 됩니다.


네척의 검은 배로 시작된 개항을 통해 일본은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되고 자신이 미국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을 일본이 우리나라에 써먹으면서 우리나라는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세상 참 불공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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