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박물관 뜰, 오월의 향기로운 역사 산책

  글: 하늬바람~

 

경기도 박물관 들머리에 세워진 선돌.

<선돌과 장승이 인사하는 마을 들머리>
아이구야, 햇살 참 좋다! 이런 날은 어두컴컴한 박물관 안 말고 박물관 뜰 산책이 제격이지. 게다가 경기도 박물관 뜰은 경기도의 많은 유물들을 이전 복원했거나 똑같이 복제하여 전시해 놓아 볼거리가 많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도 박물관 들머리에는 갓을 쓴 선돌이 듬직하게 서서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선돌이 갓을 썼습니다. 문득 은진미륵이 떠올랐습니다. 충청도 어느 마을 것인가 싶었는데 안내판에 충정도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이 선돌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갓을 쓴 걸 보면 남자이겠지만 튼실한 엉덩이에 수줍은 듯 서 있는 모습이 왠지 여인네란 느낌을 받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장승이 웃고 있다. 나무 장승은 주로 경기도나 충청도에 많이 분포한다. 남쪽의 돌장승들은 넙데데한 둥근 얼굴인데 중부 이북의 나무 장승들은 길쭉한 얼굴로 대조적이다.

사실 선돌이란 게 뭔가요? 장승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입구에 세워 경계의 표시로 삼았고, 나아가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니던가요? 아기를 낳게 해달라는 여인네들이 비는 곳이자 마을의 평화를 비는 대상이었지요. 선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거석 기념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갓 쓴 선돌은 아마 그 이후의 것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을 들머리마다 커다란 돌에 지명을 새겨 놓은 것을 볼 때마다 우리에겐 아직 거석문화의 피가 흐르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선돌(입석)과 솟대에서 발전한 장승은 사라지고 있는 반면 더 원시적인 선돌은 비록 기원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레방아를 들여온 사람은 연암 박지원이다. 《열하일기》7월 15일 신묘일(辛卯日)의 수필에서 연암은‘수레제도’에 대해 공들여 설명해 놓았다. 그중에 물의 힘으로 두 개의 바퀴를 톱니바퀴처럼 연결하고 쇠굴대를 연결하여 무려 8대의 맷돌반이 한꺼번에 돌아 밀가루를 빻는 수차도 소개했다. 연암은 그 물레방아를 함양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직접 용추 계곡에 설치하여 곡식을 찧게 하였다고.《열하일기》를 보면 정말 그의 실학정신에 탄복하게 된다. 

 

<물레방앗간의 그네들에게도 디딜방아 소리가 들렸을까?>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아소리가 들립니다. 물레방앗간에 디딜방아가‘쿵덕쿵덕. 그 모습이 신기하였는지 한 아이가 그 앞을 떠날 줄을 모르더군요. 물이 나무바퀴(물레)를 돌리고 굴대에 달린 나무가 방아채를 누릅니다. 그러면 방아채 끝에 달린 공이가 돌확의 곡식을 쿵 찧지요. 박물관의 방앗간에는 디딜방아가 두 개가 있어서 번갈아가며 곡식을 찧고 있네요.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고 다시 전기에너지로 바뀌었다고나 할까요? 전기가 없던 시절, 사람이 노동하지 않고도 곡식을 찧을 수 있었던 물레방아는 자연의 힘을 기계적인 힘으로 이용한 혁명적 도구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물레방앗간에서 밀애를 나눈 그네들에겐 방아소리가 무슨 의미였을까요? 치정이기도 하고 때론 순간적 욕망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겐 절절한 사랑이었을 그들의 만남을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장치였을까요? 메밀 꽃 하얗게 핀 시냇가의 물레방아, 마을 외따로 떨어진 물레방앗간은 낮과 밤이 주는 공간 이미지가 다릅니다.

안산 선부동 고인돌과 파주 다율리 고인돌. 마제석검, 숫돌, 민무늬토기와 붉은간토기 따위가 출토되었다. 다율리 고인돌은 발굴 때부터 하부구조를 알 수 없어서 바둑판식(남방식)으로 복원한 것이다.

<경기도의 고인돌을 볼까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어 살던 곳에는 고인돌이 있습니다. 주로 강이나 하천을 끼고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서 고인돌이 발견됩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기름진 흙이 쌓인 충적지에서는 농사짓고 살기가 좋았겠지요? 안산에서 가장 고인돌이 많이 발굴된(11기) 선부동도 바로 그런 평화로운 지역이었지요. 선부동에서는 경기도 박물관 뜰에 이전 복원된 탁자식(북방식)을 비롯해 바둑판식(남방식)이 나와 다양한 부족이 터를 잡고 살았을 것으로 봅니다.

박물관 뜰에 옮겨진 고인돌에 9개의 알구멍(성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비롯해 별자리를 새긴 고인돌이 있었습니다. 별자리를 새긴 것은 고인돌이 단지 무덤으로서만이 아니라 제단으로 쓰였다는 거겠지요. 고인돌에 묻힌 이가 저세상에서도 잘 살길 바랐을 테고, 어쩌면 날씨를 점치고 비를 내려달라는 기우제를 지냈을지도 모르지요.

강화 부근리 고인돌만큼 크지는 않지만 안산 선부동 고인돌과 파주 다율리의 바둑판식(남방식) 고인돌을 보니 경기도의 한강 등 하천 주변도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군포시 산본동의 통일신라 고분군 중 1호와 2호

<통일신라의 무덤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한강을 낀 넓은 들을 품은 경기도는 한성백제와 운명을 같이 했을 것입니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다툼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 그리고 신라의 땅이 되었지요. 그 흔적으로 통일신라의 무덤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경기도 산본동 고분군. 발굴 연도가 1990년인 걸 보면 신도시를 만들며 천 년을 넘게 지켜온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무덤은 두 가지 양식이었습니다. 긴 네모꼴로 구덩이를 파고 차곡차곡 막돌을 쌓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墳)과 네모꼴로 흙을 파내고 돌방과 널길을 만든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각각 1호와 2호분으로 명명된 두 무덤 다 둘레돌(호석)을 박았고, 주검을 안치할 받침대도 있었습니다. 누구의 무덤일까요?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방을 보니 죽은 이에 대한 정성이 살아 있네요.

고구려의 거대한 돌무지무덤이나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거쳐 삼국의 무덤이 굴식돌방무덤을 만드는 것으로 통일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장례의식은 결국 인간이 자기 존재를 돌아보는 의식이지요. 통일은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려 금속공예의 세련미를 보여주는 용두보당. 이중기단에 당간은 8마디 대나무 모양. 용머리가 달린 8번째 당간에 용의 비늘마저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그런데 입에 여의주를 찾기가 어려웠고, 용은 여위어서 그런지 좀 슬퍼보였다.(용두보당 사진:문화재청)

<당간의 꼭대기에 용과 봉황이 날아오른다>
절 입구에서 돌로 조각한 당간지주를 보았을 것입니다. 당간 끝에 깃발(당, 번)을 달아 영역을 표시하고 행사를 알리기도 했던 것이지요. 보통 당간은 없고 돌로 된 지주만 남아 있지요. 사찰의 기를 달았던 당간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안 된다면 국기게양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요? 도르래를 이용하여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실제로 기를 다는 방법도 똑같았어요. 보통 당간 끝의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 뒤로 도르래를 넣고 그곳에 줄을 넣어 기를 올렸으니까요.

그런데, 박물관 뜰에 용두보당을 본떠 당간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네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시기에 만들어진 안양 중초사지의 당간지주를 똑같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당간과 용두는 국보 136호인 용두보당을 본떠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말하자면 합성.

용두보당은 실내용입니다. 높이가 73.8센티미터이거든요. 본래의 당간지주를 축소해서 만들었겠지요. 고려 때 금동으로 만든 이 당간은 당간 끝을 어떻게 장식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유물입니다. 용두보당은 말 그대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머리 모양입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당간 끝을 봉황으로 조각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야 당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저 높은 꼭대기에 휘날릴 당(번, 깃발)을 떠올리니 비록 새로 제작한 것일망정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장식한 용두보당이 매우 멋지군요.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 대개 9세기경 이후부터 만들어졌다. 부도는 스승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달사지의 부도는 어느 고승의 묘탑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고달사지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975년)과 모양이 비슷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보다 앞선 시기인 10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승탑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는 여주 고달사지 부도>
고달사지 부도가 우리나라 국보 4호라고 하면 깜짝 놀랄 사람도 많겠지요? 여러 부도를 대표할 만한 학술적 ․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의미겠지요.

고달사지 부도 같은 8각원당형 부도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하였던 양식입니다. 석가탑 등 삼층석탑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좀 화려하다 싶습니다. 우선 기단부의 중대석에 거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부조된 용들에 눈길이 쏠립니다. 중대석 위아래로 다소곳이 엎드린 연꽃(복련)과 몸돌을 받들고 피어나는 연꽃(앙련)도 소담스럽습니다. 팔각 몸돌(탑신)엔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습니다. 또 한 번 시선을 빼앗는 것은 역시 팔각 지붕돌의 모서리마다 피어나는 꽃 조각(귀꽃)이네요. 스승을 향한 감출 수 없는 존경심의 발로일까요?

화려하다 싶은 고달사지 부도는 고달사지에서 보아야 제격이긴 합니다. 노란 산수유 꽃 피는 봄날이나 빨간 열매가 하늘을 수놓는 가을날에 보는 승탑은 오히려 소박하고 고졸하고 멋스럽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잊은 채 고달사를 이루는데 혼신을 바쳤다는 고달 석공. 그러다 끝내 스님이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고달사. 고달이 쏟은 것 같은 정성을 박물관 뜰에서 바랄 수는 없겠지요.


<배롱나무 새잎에 단풍 들겄네~>
박물관 뜰에 전시된 문화재들 사이를 걸으니 그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비록 복제품도 있으나 특히 이곳을 찾는 어린이들에게 체험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네요. 다양한 우리 문화재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 말이지요. 이 또한 박물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지.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흔히 잊고 가는 야외 전시물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배롱나무에 새잎이 돋고 있습니다. 마치 단풍 같지 않은가요? 햇살을 머금어 불그스레한 것일까요? 5월에 하얗게 피어나는 이팝나무도 좋지만 맨질맨질한 가지에 여린 잎을 피우는 배롱나무도 아름답네요. 곧 6월이 오면 앞 다투어 꽃자주색 백일홍 꽃을 피우겠지요. 푸르른 나무와 꽃과 새잎이 있어 박물관 길이 더욱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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