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조선 역사의 서글픈 자화상을 숨긴 궁궐
글: 하늬바람~
이상하게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온 날 경희궁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얗게 눈 내린 궁궐 마당이 햇빛에 반짝이고, 청명한 하늘 한쪽을 박새 울음이 채웁니다.
사람은 드문드문, 경희궁의 한적함이 마치 자신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광해군 15년(1623)에 완공되어 조선 후기 내내 이궁으로 쓰였지만, 일제 강점기에 사지가 다 잘려 나간 궁궐의 쓸쓸한 역사가 겹쳐집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궁궐이지요.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우진각지붕을 얹은 단층 문인 흥화문. 피우처(避寓處)로 지은 까닭에 단층문으로 지었다.궁장도 없이 문만 외따로 서 있는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 주차장도 아닌데 늘 차들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다른 대궐 문 앞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나마 흥화문은 56년간이나 긴 외출을 하고 돌아와 1988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경희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옛 건물이지요. 그동안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남산의 박문사(博文寺) 정문으로 뽑혀가 있었습니다. 신라 호텔의 문으로도 쓰이고 말이지요. 조선 궁궐의 정문을 개인 사당의 정문으로 쓰는 제국주의자들의 천박함이 참 어이없습니다. 아무리 역사가 강한 자의 것이라 해도 졸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도 제자리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흥화문으로 갈 때 아마 다리를 하나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도 흐르지 못하는 연못이 되어 버린 금천(禁川) 위의 다리. 바로 경희궁의 금천교이지요. 어떻게 금천이 궁궐문 밖에? 그래요, 본래 흥화문은 구세군 건물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흥화문의 편액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한경지략》에 따르면 현판의 글씨가 밤에도 번쩍번쩍 빛을 내어 ‘야주개대궐’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정말 꽃불처럼 편액이 반짝거렸을까요? 참으로 조화스러운 일입니다.
1820년대(순조 연간) 그린 ‘서궐도안’을 보면 12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놓였고, 정문인 흥화문은 동쪽 모서리에 동향하고 있다. 흥화문을 들어가 외전에 가려면 내전 앞을 지나 오른편으로 꺾어야 하는 모양새이다. 1.지금의 흥화문 2.원래의 흥화문 3.금천교 4.숭정문 5.숭정전 6.자정전 7.태녕전 8.서암
경희궁을 지은 사람은 광해군입니다. 경희궁은 지을 당시엔 경덕궁이라 했는데, 원종(인조의 아버지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다 하여 영조 때 경희궁으로 바꾸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던 광해군은 1608년에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습니다. 법궁도 이궁도 불타 버린 상황에서 행궁에서 왕이 되어야 했던 광해군은 어서 창덕궁을 중건하고 이어를 했습니다.
명·청간의 등거리 외교로 거리두기를 잘했던 광해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늘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주변에 수많은 술사들이 들끓었으니까요. 이미 인왕산 아래 이궁으로 인경궁을 짓고 있었는데도 경희궁을 또 지었으니까요.
술사 김일룡의 말인즉,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그곳에 궁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새문동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습니다. 정원군과 그의 셋째아들 능창군은 아마 많은 이들로부터 인망을 얻었던 모양. 이미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던 광해군은 능창군마저 죽이고, 그 집을 몰수하여 경덕궁을 지었습니다.
먹을 게 없어 인육을 먹기도 했다던 참혹했던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나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세상에 계속 궁궐을 지어대니 불만은 쌓이고 공사는 지지부진했습니다. 명분마저 약했던 터라 경희궁 공사는 1623년에 가서야 다 마칠 수 있었지요.
눈이 내렸는데도 샘물은 말랐네요. 물길은 부러 파놓은 듯 다소 인공의 냄새가 납니다. 광해군이 이곳에 궁궐을 짓게 된 것도 이 바위 때문이라지요.
정말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예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요?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경덕궁으로 이어할 준비를 하던 중에 1623년 3월 12일에 반정을 맞이했습니다. 반정의 주인공은 정원군의 맏아들인 능양군. 만약 그 왕기를 누르기보다 넓게 포용했더라면 어땠을까요? 포용의 정치는 정말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첫 주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였습니다. 자신이 살던 집을 빼앗았던 삼촌 광해군을 쫓아내고 다시 주인이 된 것입니다. 참 묘한 인연입니다. 인조는 광해군이 즉위했던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를 했지요. 그리고 광해군이 지어 놓은 궁궐에 임어를 했으니 말입니다.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았던 인조는 다음 해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겨우 보름이었는데도 창덕궁은 불타 들어갈 수 없었지요. 하여 인조는 경덕궁(경희궁)에서 9년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창덕궁을 동궐이라 하고 경덕궁을 서궐로 칭하며 후기 여러 왕들의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경희궁을 지킨 마지막 왕이었던 철종에 앞서 여러 왕들이 경희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즉위식을 가졌더군요. 숙종이 경희궁의 회상전에서 태어나 융복전에 승하. 하여 경종이 숭정문에서 즉위. 영조도 오랫동안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을 뿐 아니라 집경당에서 승하였기에, 정조도 숭정문에서 즉위를 하였습니다. 1776년 3월 10일의 일이었습니다. 순조도 회상전에서 승하, 헌종 역시 숭정문에서 즉위. 그 밖에 여러 왕비들의 승하가 잇달아 있었던 곳. 경희궁의 이궁으로서의 면모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숭전전 동쪽 행각에서
조정은 정전의 뜰을 가리키는 말. 회랑의 오른편으로 조정으로 들어오는 숭정문이 보입니다. 뜰에는 품계석이 있고 2층의 월대도 높습니다. 헌종 대까지도 경희궁이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니, 그 옛날 저 조정에도 문무 대신들이 조회를 하기 위해 죽 늘어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숭정전을 둘러싼 회랑이 좀 특별했습니다. 동서 행각에 북쪽으로 갈수록 돌계단이 많아 숭정전 자체가 더욱 위엄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행각 맨 위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면 죽 늘어선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깊이가 유난히 깊었습니다.
숭정전 뒤의 자정문은 올라가는 계단의 층급이 유난히 높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사정전에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높은 지대를 살리느라 이렇게 돌계단이 높은 걸까요? 좌우에 역시 행각을 거느리고 있는 자정전은 《궁궐지》에 ‘숭정전의 후전이다.’고 되어 있어 편전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정전은 숙종이 승하하여 빈전으로 쓰인 곳이기도 합니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능에 묻히기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이 걸리지요. 그때까지 재궁(왕의 관)을 안치하고 예를 갖추는 곳이 빈전입니다. 아마 자정전 서쪽에 재궁을 보관할 찬궁을 만들었겠지요? 그리고 찬궁의 남쪽에 숙종의 신위를 모셨을 것입니다. 어좌만 쓸쓸한 자정전 안을 들여다보며 잠시 당시의 정황을 어림짐작하여 봅니다. 그 뒤 왕위를 둘러싼 당쟁의 대리자가 되어야 했던 경종과 연잉군(영조)의 황망하고 슬픈 통곡소리도 들렸겠지요.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태녕전. 편액의 글씨는 복원하면서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해서 붙였다.
영조는 재위 기간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습니다. 해서 많은 이들이 경희궁을 ‘영조가 사랑한 궁궐’이라 합니다. 태령전이 원래는 어떻게 쓰인 건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곳입니다. 꼬장꼬장한 눈매를 가진 영조가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영조가 경희궁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던 만큼 정조가 세손 시절을 보낸 곳도 경희궁이었습니다. 경희궁 존현각에서 머물던 정조는 노론 세력의 공격으로 끊임없이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습니다. 심지어 보위에 오른 지 1년이 된 1777년 7월에는 존현각에 자객이 들었다고 하지요.
《정조 실록》에선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류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존현각이 어디쯤 있었을까, 정조가 영조 50년에 작성했다는 《경희궁지》를 통해 더듬어보니 주로 대내의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던 회상전 남쪽에 흥정당이 있고 그 동쪽에 석음각, 존현각이 있다고 하니 지금은 서울 역사박물관 자리 어디쯤일 것 같습니다. 대대로 왕들이 세자 시절에 공부하던 곳이고 정조 자신도 여기서 공부하였는데 지금은 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그렇다면 잠시 폐하였던 전각을 즉위 후에 다시 썼던 것일까요?
태녕전 영조 어진 앞에서 잠시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손자인 정조 삼대에 걸친 비극적인 운명을 다시 돌아보니 한적한 경희궁이 더욱 쓸쓸합니다.
경희궁이 이궁으로서의 지위를 잃기 시작한 때는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부터입니다. 고종이 경복궁에 임어하면서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부 창고로 쓰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래도 고종은 경운궁에 있으면서 석교(구름다리)를 놓아 경희궁을 오가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경희궁이 본격적으로 사지가 잘려나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나라를 빼앗으면서입니다. 1910년, 이 자리에 일제는 총독부 학교를 세웠다가 1915년 이름을 경성중학교로 바꾸었지요. 그런데 총독부가 인수한 학교의 전신이 일진회장 이용구와 송병준이 세운 일본 거류민 중학교였다니 그자들은 뼛속까지 친일파였던 것입니다.
이제 경희궁 훼손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정전인 숭정전 건물을 중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회상전은 소학교 교원 양성소로 쓰였습니다. 그러다 숭정전은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팔아버렸지요. 일제의 경희궁 파괴는 도를 넘어서 관공서를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건물을 팔아먹는 식이어서 결국, 1930년대에 들어선 거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뼈아픈 역사는 끝까지 넘어서야 할 서글픈 자화상을 남기는군요.
도심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는 경희궁. 새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무에 스치는 바람의 노래도 들을 수 있습니다.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경희궁에 들르면 코도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마음도 시원해지긴 어렵네요. 그 어떤 궁궐보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박제화 되는 느낌! 경희궁의 존재 이유가 고즈넉한 산책이나 야외 공연은 아닐 터. 복원의 한계와 복원의 진정한 의미를 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