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 현장에서 김종서를 만나다

글: 하늬바람~


<공주의 남자가 아닌 김종서를 만나러 가다> 
최근 방영 중인 몇 편의 사극. 그 중 수양대군 딸과 좌의정 김종서 아들 사이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것도 있더군요. 공주의 남자. 만약 실화라면, 두 남녀는 가히 선전하는 대로 ‘조선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요.

조선 후기에 쓴 야사집인 《금계필담》에도 수양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충북 보은으로 도망쳐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실록에는 세조에게 딸이 하나로 의숙공주라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세희라는 딸이 하나 더 있었지요. 역사에 밝혀지지 않은 세희가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을까요?

김종서 집터. 지금 충정로 농업박물관 자리이다. 돈의문에서 불과 100미터도 되지 않는 지척. 정승 집이 이렇게 도성 서대문 밖에 있는 것도 좀 놀라웠다.

그러나 오늘은 계유정난을 더듬어 보며 김종서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두 남녀의 사랑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데에는 계유정난이라는 조선 역사의 비극적 사건이 가로놓여 있고, 김종서는 계유정난의 대표 희생자이지요.

계유정난.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여 미리 역도들을 일망타진 위기를 평정하다. 이것은 수양의 말. 실은 수양의 반정 신호탄.

역사엔 만약이 없다지만, ‘만약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가 없었다면?’이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처절했던 왕위 찬탈이었고, 이후 조선의 정치 지형에 의미심장한 변화를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강북삼성병원 옆 돈의문 터. 1915년 일제가 길을 넓히면서 없애버렸다. 한명회와 권람은 돈의문 성안에 무사들을 배치하여 유사시 수양을 도우려 했다. 전철이 돈의문 홍예를 지나다니는 사진이 남아 있다.

<계유년(단종 1년, 1453) 10월 10일 김종서가 죽다>
늦가을 바람이 우수수 불었을까요? 해 저문 시각에 돈의문 밖 좌의정 김종서의 집에 수양대군이 종 임어을운(임운), 양정, 유서 등을 데리고 들어섰습니다. 이미 정국이 수상하다는 것을 짐작하던 터라 김종서 쪽에서도 아들 김승규와 친구 신사면, 윤광은을 비롯하여 말 탄 무사들이 집 주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권람이 찾아오더니 이번엔 수양대군. 수양대군은 집안으로 들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사모뿔이 부러져 잠시 빌리러 왔다고 하더니, 실은 종부시에서 영응대군의 일을 탄핵하는데 정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청을 하러 왔다고 둘러대었습니다. 영응대군은 세종의 8남으로 두 번째로 혼인한 아내 정충경의 딸을 내쫓고 첫 번째 아내 송씨를 불러들여 논란이 되고 있었지요. 그래도 아들 김승규와 친구들이 곁을 떠나지 않자 비밀스런 청이 있다 하고 잠시 뒤로 물러나 있게 하였습니다.

편지를 읽는 순간,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아들 김승규도 양정의 칼에 쓰러졌습니다. 계유정난의 시작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는 재동 일대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그날 밤 일을 경복궁 부엉이도 알았던 것일까?>
권람의 지시에 따라 문을 열어둔 돈의문을 지난 수양은 권람을 만나 순청(야간 순찰을 맡은 관청) 순감이었던 홍달손과 순졸을 이끌고 단종이 머물던 가회방 시좌소(임시 궁궐)로 향했습니다.

당시 단종은 경복궁이 부담스러웠던 듯. 실록에 따르면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사욕으로 창덕궁을 중수하여 크게 수리하고 이어하도록 했다고 세조의 편에서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어쨌든 단종은 창덕궁 부근 시어소를 편해 하였던 반면, 음양학 문득겸이 불과 정난 이틀 전 에도 창덕궁이 길한 방위가 아니니 경복궁으로 입어할 것을 청하는 기사가 있는 걸 봐서 수양대군 쪽에선 창덕궁 이어를 마뜩치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대신들을 부르는 전지를 내리도록 했습니다. 비록 13세의 어린 나이지만 총명했던 단종은 숙부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겠지요. 《단종실록》9월 기사에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등 이곳저곳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했던 것일까요? 
 
 

헌재 뒤편의 백송은 600살이 넘었다는데 계유정난의 광경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궁궐과 성안이 피로 물들었던 밤>
수양대군은 내금위 봉석주로 하여금 무장하고 남문 내정을 지키게 하고, 순군(巡軍)은 시좌소 앞뒤 골목을 차단하게 하고, 직접 순졸(巡卒)을 거느리고 남문 밖 가회방 동구(洞口) 돌다리에 주둔해 황보인 등을 기다렸습니다. 서쪽으로 영응대군(永膺大君) 집(안동별궁 추정)과 동쪽으로 서운관 고개를 봉쇄하고 돌다리부터 남문까지 마병과 보병으로 문을 네 겹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철퇴가 제3문에서 끊임없이 내리쳐졌습니다. ‘살생부’를 든 한명회. 병조판서 조극관,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경덕궁(태조의 개성 잠저) 궁지기에 불과했던 한명회 손에 대신들의 생사가 갈렸습니다.

비린내가 진동하고, 붉은 피가 밤새 내를 이루었습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냄새를 못 이겨 재〔회(灰)〕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다고 해서 잿골이라 부르던 것이 지금 재동(齋洞)이 되었지요.

김종서가 그의 집에서 바로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종서는 피를 흘린 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집 앞 돈의문뿐 아니라 숭례문, 서소문도 이미 수양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부인의 가마를 타고 우선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몸을 숨겼지만 추격해온 수양의 역사 양정의 칼에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70세. 문무를 겸비했던 재상.‘대호(大虎)’라 불렸던 한 인간 김종서.

그날 하늘도 놀랐을까요? 달이 사라지고 하늘이 컴컴해지는데 유성이 떨어졌다지요. 아마 김종서의 별이었을까요?

 

안평은 꿈속에 노닐던 도원(桃源)의 풍경을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로 그리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금 부암동인 인왕산 기슭을 돌아보다가 꿈속에서 본 도원과 같다며 ‘무릉계’(武陵溪)란 뜻의 ‘무계정사’를 지었다. 안평은 여기서 시도 짓고 활도 쏘며 주위에 사람을 끌었으리라.

<‘무계동’ 바위 글자로 남은 안평대군의 허망한 죽음>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집에서 체포되어 강화로 끌려갔습니다. 두 아들도 강화로 압송. 안평대군은 끝내 강화 교동에서 교형으로 죽었습니다.

안평대군의 첩과 아들 의춘군 이우직의 아내는 변방의 관비가 되었습니다. 이우직은 아직 강화 교동에 살아 있었지만 결국 1년 뒤 단종 2년 한가위에, 건원릉과 문종 현릉에 제사를 지내고 오는 길에 법에 따라 사형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지요. 이때 아직 살아 있던 김종서 ․ 황보인 ․ 이현로 등의 아들, 손자들을 결국 다 죽여 버렸습니다. 추석날에 39명이 다시 죽었던 것입니다.

시 ․ 서 ․ 화에 빼어난 재능을 지녔던 사람. 그 재능을 흠모하여 많이 이들이 기꺼워했던 이. 문종 대에 왕실을 대표하고, 단종 대에 황표정사로 수양과 맞섰지만, 그가 왕위 찬탈을 꿈꾸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안평대군의 별장이었던 무계정사 터가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고 하여 왕기가 서려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는 《단종실록》의 기사가 그의 야심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까요?

수양의 동생이었기에 그는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정난공신뿐 아니라 수양의 종 임어을운조차 영의정 황보인의 집에서 거들먹거리며 살게 된 때에 말이지요. 이제, 세상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의 것이 될 테지요.


경회루. 경회루에서 단종은 대보를 수양대군에게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박팽년은 그날 슬픔을 누르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지려 했다던가.

<수양대군이 근정전 뜰에서 조선의 왕이 되다>
영의정부사, 영경영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 세조가 받은 직위. 한마디로 의정부와 인사권을 가진 이조와 병권을 다루는 병조를 다 꿰찼으니 왕인 셈. 그래도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은 이어졌습니다.

단종 3년 윤 6월 11일, 언제 난이 일어날지 불안했던 수양대군은 동생 금성대군에게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단종에겐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사람들인 혜빈 양씨, 매제인 영양위 정종, 상궁 박씨가 유배를 가고 삼촌들 중 가장 가까웠던 금성대군도 삭녕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날 단종은 대보를 수양에게 넘길 것을 결심했지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던 듯. 동부승지 성삼문이 대보를 내오고, 환관 전균이 경회루 아래로 받들고 갔습니다. 이윽고 단종이 수양에게 대보를 내렸지요. 그 뒤 이어진 눈물어린 사양은 면피용. 당일로 근정전 뜰에서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선위를 받았습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한 반정의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영월 장릉. 단종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고단했던 그의 삶처럼 사초강도 가파르다.(사진:문화재청)

그 뒤 사육신의 상왕복위 기도를 비롯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지만, 부당하게 왕이 된 세조는 결국 자기 손으로 동생(금성대군)을 죽여야 했지요. 그만큼 불안했을까요? 단종은 17세에 영월 청령포에서 비참하게 그러나 결연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공주 장기면 대교리에 있는 김종서 묘. 아들 김승벽이 김종서의 시신을 말에 싣고 고향 공주로 달려와 장사를 지냈던 덕분에 묘가 남아 있을 수 있었다.(사진: 문화재청)

<나무 끝에 삭풍 부는 함길도와 북만주를 누비던 호랑이, 김종서>
젊어 대간 시절엔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던 기개가 있었다지요. 때로 세종의 뜻을 거스르기까지 하여 속장 80대를 맞을 정도로. 세종의 비서인 승지(우부승지, 좌부승지, 우대언) 시절엔 세종을 도와 국정 수행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던 김종서는 세종의 명을 받고 함길도로 가 북방 개척의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세종 15년 1월 최윤덕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4군 개척의 깃발을 올리고……. 12월에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시작하여 병마도절제사가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 개척에 나섰지요.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나아가 동북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 강역을 확장. 그러는 동안 김종서는 세종과 문종의 굳건한 대신이 되었고, 어린 단종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쓰니 보니 글이란 게 울림 없는 껍데기가 되기 싶구나 싶습니다. 이런 이력이 인간 김종서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세종에게 김종서는 벗이었을 것입니다. 문종에겐 가슴 아픈 고명을 남긴 신하이기 전에 아버지 같은 존재였을 거고, 단종에겐 든든한 할아버지였겠지요.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에게도 정도전처럼 ‘신권정치’의 야망이 있었을까요? 거침없이 장백산을 돌아 두만강에 말을 씻기는 그에게, 그런 야망을 읽지 못하는 내가 순진한 것인지.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 상왕복위를 추진했던 사육신 중 유성원은 먼저 자결하고, 국문을 당한 성삼문, 이개, 하위지, 박팽년, 유응부와 관련 인물들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겨 죽었다. 200년도 더 흘러 숙종 때 이곳에 서원을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릴 수 있었고, 정조는 신도비를 세웠다.(사진: 문화재청) 

<계유정난, 수양대군의 쿠데타일 뿐!>
쿠데타와 봉기 또는 혁명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국 정당성이 민중으로부터 나왔나, 역사 발전에 기여했는가의 차이는 아닐지. 수양은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충의로 결단한 반정’이라 여겼지요.

지금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말 그대로 ‘정난(반역의 위기를 평정함)’으로 보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의 권력 장악이 왕실을 위태롭게 했다는 그 정도가 반정의 논리가 되지 못할 때엔 이후 세조의 치적을 내세워 불가피성을 역설합니다. 군부 쿠데타 세력들의 주장과 일맥상통.

수양에겐 과연 반정, 실은 쿠데타의 길뿐이었을까요? 스스로를 주공에 비유하고도 말이지요.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열었던 주 무왕이 어린 성왕을 두고 일찍 죽자 무왕의 동생 주공은 섭정을 통해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지요. 그리고 섭정 7년 만에 조카 성왕에게 왕권을 되돌려 주었지요. 하지만 수양은 입으로만 주공을 내세웠을 뿐 내심, 장자가 아니지만 왕이 되었던 부왕 세종과 할아버지 태종의 길이 자신의 운명과 같다고 끊임없이 합리화하지 않았을까요?

안평대군 별장은 쓸쓸한 빈 터가 되었다. 권력의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부당한 왕권찬탈은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상처를 남기지요. 그러나 권력을 쥔 이들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느끼는 법. 상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안에서 곪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세조. 그리고 그가 손잡은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의 세상은 ‘사화’라는 회오리를 예정하고, 썩은 정치에 대한 좌절을 안기고, 군신의 도리도 언제나 뒤집힐 수 있다는 반정의 논리를 재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유정난은 좌절의 슬픈 역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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