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교과 초등 사회 6-1 힘을 겨루며 성장한 세 나라
남한강으로 중원 고구려비를 보러 가요
글 • 하늬바람~
* 비록 초라하게 서있으나...
충주 노원에 갈 일이 있어 지나는 길에 중원 고구려비를 보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앙 탑평리 7층 석탑 둘레엔 멋지게 조각 공원까지 꾸며 놓았던데 고구려비는 예상과 달리 길모퉁이 비각 안에 다소 초라하게 서 있더랬습니다. 왠지 연민이 이는군요.
- 안내판에 ‘5월 중 고려 태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태왕은 누구일까요? 고려라 함은 고구려를 뜻하지요. 고구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고려라 했습니다. 특히 장수왕 이후에는 외교 문서에도 고려란 나라 이름을 주로 썼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고구려에선 왕들을 태왕이라 했으니 정확히 어느 왕인지는 알 수 없어요. 5월이라고만 나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황상 광개토대왕, 장수왕, 아니면 그 아들인 문자왕 이 셋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지요. 문화재청의 설명으론 장수왕이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이 중원비는 고구려가 한참 남하할 때 중원을 장악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비문 내용이 대강 ‘태왕이 고구려 관리와 신라 사람들에게 옷 따위를 하사하고 꿇어앉도록 했다’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고구려와 신라가 친선을 도모하자는 내용이지요. 5세기 고구려의 국력이 남으로까지 뻗어나갈 때 국경을 가르는 정계비의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 이 비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본래는 바로 길 건너에 나뒹굴고 있었죠. 그 옛 이름이 선돌배미예요. 배미는 논 또는 논을 세는 단위이니까 비(선돌)가 서 있어서 아마 선돌배미라 불렸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거기도 처음 비를 세웠던 곳인지는 정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6세기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이 일대도 신라의 영토가 되는데, 진흥왕이 이 비문을 보고 치욕을 느꼈을 거고, 그때 비문을 제자리에서 치웠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지요. 문화재 발굴 과정마다 사정이 다 있겠지만 그나마 기왕에 발견된 데에다 잘 세웠으면 좋았겠지요.
* 때를 기다린 비석
- 이 비는 1979년에야 발견이 되었는데 후손들이 자기를 잘 알아보고 보호해줄 때까지 신분을 잘 감추어 왔다고들 이야기 하지요. 발견될 때 완전히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딱 ‘5월 중 고려 태왕’이란 글자를 알아본 거예요. 게다가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었지요.
야, 이건 보통 게 아니구나, 고구려 것이구나 하고 다들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이게 일제 시대 때 왜놈들에게 발견되었어 봐요. 비가 그리 크지도 않은데(비 전면의 높이 144㎝, 폭 55㎝) 일본 놈들이 실어갈 수도 있었지요. 우리나라의 많은 유물이 그렇게 실려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비가 자기를 알아줄 때를 알았던 것이지요.
- 지금 대강 판독 가능한 글자는 130여 자 정도지요. 워낙 마모가 되었거든요. 원래는 400여자 정도 새겼을 거로 보는데. 한자라 하더라도 중국식으로 쓴 게 아니라 아직 정확한 내용을 단정할 수는 없답니다. 부근에 고구려 금동광배가 출토 되는 등 고구려의 흔적도 있으니 앞으로도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야지요.
잠시 정말 이곳이 한반도의 중앙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게 되네요. 그래서 중원, 국원이라 하였지요. 그리고 오늘따라 푸르른 남한강 강물이 ‘교통의 요지’ 였다는 사실도 실감나게 합니다. 가만 보면 이곳은 중원답게 고구려,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뒤엔 고려의 강력한 호족 세력이 살았던 터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몹시 훼손된 중원 고구려비!
동북공정의 바람 속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비!
오늘은 봄바람과 함께, 말 타고 이 지역을 누볐을 고구려의 희미한 숨결을 안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