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숙빈 최씨와 장희빈의 운명적 대결이 펼쳐지던 창경궁

글: 하늬바람~


 대비와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던 창경궁의 통명전.  

가을은 청명한 하늘이 첫째인데, 올 가을 문턱엔 비가 잦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창경궁을 찾아간 날은 그래도 다행히 먼지잼할 정도로 비가 공기 속에 떠돌아 궁 나들이에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 대비전(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을 위해 지은 궁궐이라 다른 궁궐보다 여인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또 인조 이후 창덕궁이 법궁으로 쓰이며 왕과 왕비들이 함께 넘나들며 거처하던 궁이라 왕실의 이야기가 풍성하지요.

그 중엔 드라마‘동이’와 관련된 장소도 있으니,‘동이’와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의 목숨 건 대결이 펼쳐지던 통명전이 그곳입니다. 아마 드라마는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지만, 아이들도‘동이’를 열렬히 시청했는지, 여전히 관심이 많더군요.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으로 순조 연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파란색 원이 퉁명전 일대이다. 
창경궁 통명전이 불에 타 아직 중건되지 않아서 빈터로 나와 있다. 터 서쪽으로 연지가 보이고 북쪽에 열천 샘이 표시되어 있는 것, 또 정면 7칸 측면 5칸임을 입증하는 초석도 신기하다.

<통명전 뒤 열천은 최숙빈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일까?>
통명전 뒤에 있는 이 샘에‘열천’이란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영조입니다.
‘열천’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라는 뜻이지만 사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경》에 나오는 이 말은 중화문명의 시작인 주나라와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여전히 호란으로 나라를 짓밟았던 청나라를 멸시하는 의미로 쓰인 말이기 때문이지요.

 “‘통명전 곁에 샘이 있는데, 이름을 열천으로 부르도록 하라.’하고, 소지(小識)를 불러주어 쓰게 하고,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는 기록이《영조실록》영조 33년 5월 29일에 나와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우물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와 관련이 있을까요? 많은 이들은 영조가 생모인 숙빈 최씨가 아끼던 우물이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 샘에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물을 긷는 등 험한 일을 하던 무수리(?) 출신인 최숙빈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에 이 샘물을 떠다놓고 치성을 드렸는데 숙종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글쎄요,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신데렐라의 인생을 살게 해준 우물이니 각별히 아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썩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네요.

오히려 영조 33년이면 사실은 7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양어머니이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인원왕후가 훙어한 해(1757년)이니 흔히 대비전으로 쓰이던 통명전(빈전이었을 수도 있겠다.)에서 인원왕후를 그리워하며 ‘열천’이란 이름을 내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숙빈 최씨의 생일에 숙빈묘에 올렸던 제문. 영조가 직접 쓴 초고이다.

  <숙빈 최씨는 정말 무수리였을까?>
흔히 숙빈 최씨의 출생과 관련한 야사는 <정읍군지>나 담양 용흥사에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정읍군지>에선 태인면 거산리 대각교에 있는 다리에서 인현왕후와 고아로 떠돌던 최숙빈이 처음 만났다고 하고, 정읍이 최숙빈의 고향이라 주장합니다. 담양 용흥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것인데 본 이름이 최복순이라고 하네요. 두 이야기 다 최숙빈이 인현왕후와 만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었을 때 함께 궁에 들어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무수리라는 것은 더욱 얼토당토않은 설인 셈입니다.

가장 공식적인 기록은 영조가 세운 신도비와 실록의 기록입니다. 공식적으론 아버지는 최효원(영조 1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이며, 한성부 여경방에서 출생하였고, 숙종 2년인 7살에 입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숙종 9년에 중전으로 간택되어 입궐하는 15살의 인현왕후와 미리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은 믿기 어렵지요.

생각시 시절 침방에서 나인 견습을 한 최숙빈은 인현왕후전의 침방나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보통 궁녀를 관노비 중에 6,7세의 똑똑한 아이를 뽑았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최숙빈이 공노비 출신의 천한 신분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고요.

그런데도 무수리설이 그토록 끈질기게 도는 이유는 드라마 동이에서 홍보하는 것처럼 가장 천한 처지의 여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음을 강조하고 싶은 심리 탓일 것입니다. 물론, 확실한 기록이 없으니 절대 아니라고 할 순 없겠죠?


통명전 연지, 이곳에서 숙빈과 희빈도 조우했을까?

<장희빈과 최숙빈, 그녀들의 공통점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가장 천한 계급인 종, 즉 천민 출신으로 왕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천민이란 계급을 뛰어넘어 한 나라의 지존인 왕의 사랑을 쟁취했지요. 장희빈의 아들 이윤은 경종(20대), 최숙빈의 아들 이금은 영조(21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국모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거나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니, 왕의 어머니가 되었다 한들 온전한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겠습니다.

그런데 장희빈의 신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천민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아버지가 중인 계급이고, 삼촌인 장현은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역관 출신의 거부인데도, 어머니가 당시 남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조사석 쪽의 여종 출신이란 것을 앞세우기 때문이에요.

아마 장희빈은 대단히 여유롭게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궁궐 행을 택한 것은 미모까지 겸비한 장옥정에게 승은을 기대한 남인의 의도와 계획이 있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장옥정 스스로가 대단히 진취적인 여성인 것이죠. 역관 집안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보통 여성의 길을 내던지고 전혀 새로운 모험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이런 점에서 장희빈의 도전적 이미지와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새롭게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통명전의 팔작지붕이 전각의 위엄을 더해 준다. 


<창경궁 내명부의 중심, 통명전의 빛과 어둠>

멀리서 통명전을 바라봅니다. 확실히 내전의 여러 전각들 가운데 단연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통명전은 대비와 왕비의 침전으로 쓰던 전각입니다.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이 중전의 공간이라면 통명전은 오히려 대비의 처소로, 때론 왕의 편전처럼 쓰기도 했었지요.

창경궁 안에선 유일하게 용마루가 없는 곡와로 지붕을 올렸어요. 흔히 왕이 드는 침전엔 용이 용을 누르지 않기 위해 용마루를 두지 않는다고 하지요. 또 월대도 널찍하고, 드므도 두어 이곳 주인을 잡귀로부터 지키고 있습니다.

밝음과 통하여 왕자를 생산해야 할 이 전각에 300여 년 전 숙종을 둘러싼 세 여인의 목숨 건 대결이 잿빛 어둠처럼 펼쳐졌다는 게 잠시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현왕후는 나날이 쇠약해지는 몸을 추스르며 이곳에서 햇살 쏟아지는 후원을 내다보며 '밝음'과 통하길 바랐을까?  
 
<우연인가, 운명인가? 숙종과 숙빈 최씨의 만남>
정말이었을까요? 최숙빈은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서궁(안국동 감고당)에 있는 동안 전 중전을 위하여 기도를 올려왔다고 하지요. 그날은 인현왕후의 탄신일 전 날이라 더욱 정성들여 기도를 올렸을까요? 숙종은 한 궁인의 방에서 불을 환하게 밝히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축원하는 최숙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축원의 대상이 자신이 쫓아낸 인현왕후라고 답하는 여인! 그리고 여인의‘의’에 감복하여 숙종은 ‘승은’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숙빈 최씨는 서서히 장희빈에게 회의를 느끼고 있는, 혹은 남인의 독주에 경계심을 품고 있는 숙종의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단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면 무모할 정도로 담대한 여자이든지…….

그 뒤 통명전에서 밤을 보냈다, 최씨 궁인의 방에서 역사는 이루어졌다 등 이야기는 더욱 윤색되어 전해지게 되는데, 숙종과의 운명적 만남은 숙종 ~ 영조 연간에 살았던 이문원이 쓴 《수문록》에 전해집니다. 이문원은 종2품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인물로 당파는 서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최숙빈이 인현왕후와 함께 서인 나아가 노론의 편에 선 인물인 걸 감안하면 아무래도 기록은 최숙빈에게 유리한 쪽으로 서술하였겠지요.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조 어진.

<최숙빈도 당쟁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숙빈 최씨는 초고속 승진을 하였습니다. 숙종 19년(1693) 4월 26일 종4품 숙원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된 최씨는 다음해 왕자 이금(영조)을 배어 종2품 숙의가 되고, 이듬해 귀인을 거쳐 정1품 빈이 되니 궐내에서 장희빈과 대적할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요. 어찌 보면 인현왕후는 그녀의 주군과 같은 존재이면서 실은 고속 승진의 동력이요, 방패막이였을 것입니다. 인현왕후를 다시 불러들이는 비망기를 숙종으로 하여금 쓰게 역할하고, 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을 제거하는‘취선당 신당’사건을 고변했던 사람도 최숙빈이었으니까요.

그 사이 숙종은 네 차례나 환국을 하며 정국을 이끌어 왔습니다. 즉위하자마자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을 축출하고 외가와 종친을 키웠고,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내쳤지요. 이때 장옥정이 3년간 사가로 쫓겨나 있기도 했고요. 그러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서인들이 쫓겨나며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왕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5년 뒤엔 서인의 폐비복위운동이 성공하면서 남인들은 대거 죽거나 유배당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며 인현왕후는 다시 중궁전으로 돌아오지요. 최숙빈은 적어도 갑술환국부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숙종 27년(1701) 8월 14일 인현왕후가 통명전 앞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장희빈은 통명전에 죽은 생물을 묻었나?>
인현왕후가 죽고 40일 만에 숙종은 다시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유배 중인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를 처형하고, 장희빈에게 자결을 명하였지요. 친히 8일 동안 국문까지 나섰던 이 사건의 뒤엔 최숙빈의 고변이 있었습니다.

통명전과 대조전 주위에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난 장희빈이 시름시름 앓던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원하며 죽은 쥐, 붕어, 그리고 인형 따위를 묻었다는 것이지요. 취선당 옆에 신당을 차려놓고 굿을 하고 말이지요. 물론 조사에서 저주의 기물이 나오진 않았습니다.

결국, 10월 10일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두 달도 안 되어 사약을 받았습니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숙종이 창경궁 춘당대에 있는 영숙궁으로 달려가 장씨를 강제로 끌어내었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숙종이 그런 체신 머리 없는 행동을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파주시 광탄면에 자리한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

<최후의 승자 그러나 최숙빈은 통명전의 주인이 되지 못하였다>
최숙빈이 이 통명전의 주인이 되지는 못하였네요. 숙종의 사랑을 받고, 인현왕후를 방패삼아 아들을 다음 보위에 오르도록 한 최숙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조선의 신데렐라로 묘사되기도 하고, 여인들마저 당쟁의 희생양으로 스러질 때 처신을 잘했던 지혜로운 여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나름 시류(時流)를 읽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끝내 최후의 승자는 최숙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바로 이현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그녀의‘스며듦’의 철학이 빛을 발했는지는 몰라도, 왠지 순응의 그림자가 느껴져 쓸쓸합니다.

그리고 통명전의 장중함은 조선의 신분 사회의 울타리가, 여성의 한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 동궐도와 영조 어진, 소령원 사진은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에서 옮겨 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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