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무량사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생각한다

글: 하늬바람~

무량사의 중심 극락전. 보물 356호인 극락전은 1633년 인조 연간에 다시 지었다.

 <충청도 시골의 아름다운 절 무량사>
부여 무량사 가던 날은 단풍이 지쳐 겨울의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한 ‘가을 끝자리’였습니다. 구름 없는 하늘은 엷은 안개를 흩뿌린 듯 광활하면서도 낮았습니다. 대천IC까지의 길은 몇 개의 낮은 구릉을 지나고 너른 들판을 지나는 충청남도의 전형적인 풍경. 대천으로 빠져 나가자 비릿한 바닷냄새가 나는가 싶던 길은 어느새 충청남도라는 편견을 확 깨버리는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성주터널을 지나 구불대는 산길은 제법 높기 때문입니다. 성주산 자락을 넘어가면 다시 너른 들을 만나는가 싶다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만수산의 위용에 다시 한 번 놀랐지요. 그 만수산 깊고도 너른 골짜기에 무량사가 있었습니다.

단풍이 한창일 때 왔다면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이 절경이었을 좁은 포장도로. 그 끝 무량사 마을은 아직 번잡하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두어 집에서 가게 밖에 표고버섯과 도토리묵을 내놓고 손님을 끌 뿐입니다. 쫀득하고 구수한 도토리묵처럼 마음도 넉넉해집니다.

 

무량사 일주문은 지붕은 공포가 화려하지 않아 소박하다. 기둥은 튼실한 원목을 그대로 세워서 전체적으로 단정한 느낌이다.

<천 년 세월만큼 보물을 품은 절>
무량사는 9세기 통일신라 말에 지은 사찰로 추정합니다. 사찰 안내에는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되어 있지만 범일이 9세기 사람이며 또 낭혜화상 무염이 중창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사실상 무염이 지었으리라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

무량사 또한 두 번의 전란을 피해갈 수 없었으니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의 화마였지요. 하여 지금의 건축은 임진왜란 후 인조 연간에 지은 것을 1872년 중수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탑과 석등 같은 석물은 1천년을 훌쩍 넘긴 보물이요, 극락전이나 아미타소조불, 미륵후불탱은 400여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귀중한 보물들입니다.

그렇다면 김시습이 무량사를 찾았을 때는 어쩌면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량사’란 이름이 극락세계를 의미하듯이 매월당이 58세의 나이에 찾아왔을 당시(1492)에도 이곳은 모든 아픔을 수용해 줄만한 극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편안하고 아름다운 절이었습니다.
 

우리 건축에 2, 3층 전각이 드물다. 금산사 미륵전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하다.  

<극락전, 전각이 이리 아름다워도 될까>
무량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을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건축의 미는 액자 기법입니다. 쌍계사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로 이어지는 액자들의 연속, 부석사 안양루 계단에서 바라보는 무량수전 등……. 돌계단을 한 단씩 올라설 때마다 드러나는 자태, 네모난 틀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전경. 그 시원함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요?

천왕문 올라가는 산길도 좋았지만 천왕문에서 바라보는 극락전은 참으로 고왔습니다. 문득 금산사 미륵전이 떠올랐지요. 금산사 미륵전이 3층 통층 건물로 우람한 남성미를 자랑한다면 무량사 극락전은 2층 통층으로 단아한 여성스러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연약한 여인네가 아닌 강단 있는 여성상이라고나 할까요?
 

그에 비해 무량사 2층 전각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1633년 인조 연간에 지어진 절집. 전쟁은 사람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었을 터, 오히려 절집도 화려하게 불상도 크게 조성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것이 백성들의 자발적 불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조선이 비록 유학의 나라이나 오랫동안 백성들 가슴엔 불교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지요. 먹을 것이 없어 인육조차 먹었다던 살벌했던 전란을 경험한 백성들은 그래도 서방정토로 이끌어줄 부처를 받들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여튼 이 시기의 절집은 장식성을 강조하여 장중하고 위엄 있게 보이려 했는데, 무량사 극락전은 그 대표 건축물이지 싶습니다.

다포식 공포는 위로 갈수록 출목이 많아 화려한 느낌을 더해 주네요. 아래층 문짝은 가운데에서 바깥으로 네 짝에서 점차 줄어 두 짝, 한 짝이 되는데 문살도 꽃창살에서 만살로 바뀌면서 조화롭고 옆으로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색 바랜 단청은 오히려 아름다워 아, 절집이 이리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찬탄하게 됩니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염원하는 부처이다. 극락전 아미타불은 한 손은 올리고 한 손은 무릎에 내린 채 양쪽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아미타구품인 중 중품중생인을 하고 있다. 이는 중생을 모두 9품으로 나누어 그에 맞게 설법을 해야 제대로 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사진: 문화재청)

<이렇게 손이 큰 아미타여래는 처음!>
극락전이니 당연히 불전 안에는 아미타불이 계십니다. 높이가 5.4미터. 흙으로 빚은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라 합니다.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는데 보살님들도 4.8미터나 되니 만만치 않은 불상입니다.

아미타불의 복장유물에서 발원문이 나와 1633년에 빚었다는 것, 따라서 극락전의 연대도 이때였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부처님의 손입니다. 야, 크다! 유난히도 큰 저 손은 “아미타불”을 외는 수많은 중생들의 서원을 다 받아주겠다는 뜻이겠지요.

아미타불 48서원 중 18번째 서원인 염불왕생원. 날마다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외면 극락왕생을 할 것이라고 하였지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애창곡을 18번이라 말하는 게 아미타 서원에서 유래했다니, 슬며시 웃음도 나오네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사진: 문화재청)와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오누이>
누가 누이이고 누가 남동생일까요? 무량사 석탑은 참으로 정림사지 탑을 닮았습니다. 나이로 봐도 정림사지 탑이 누님인데, 두 탑만 견주어 본다면 정림사지 탑이 훨씬 늘씬한 멋, 상승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량사 오층석탑을 ‘아, 그래! 좀 뚱뚱한 정림사지 탑!’하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뚱뚱하다는 표현은 모욕적입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높이가 7.5미터로 정림사지 탑에 비해 낮지만 몸돌이 지붕돌에 비해 낮아서인지 장중한 맛이 강하지요. 안정적인 체감률도 심리적인 편안함을 줍니다. 비록 통일 신라 시기를 거쳐 고려 초에 만들어진 탑이지만 백제의 정신과 양식이 오롯이 깃들어 있는 탑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습니다.

석탑 앞 석등도 역시 고려 초의 것으로, 연화석에 팔각 간주, 역시 팔각형의 화사석에 지붕돌의 추녀는 경쾌하게 올라갔습니다. 천왕문에서 일직선상에 놓인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은 완벽한 균형미와 조화미를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네요.


극락전 뒤로 가다 보면 작은 개울을 만나고 건너편에 지어 놓은 삼신각과 청한당이 평화로워 보였다. 선방 겸 손님방이라는 청한당은 김시습의 호‘청한자(淸寒子)’에서 따왔다고. 그 자체가 풍경이다.

<김시습이 한량없는 광명이 비치는 무량사를 찾아오다>
1492년 어느 날, 김시습이 무량사를 찾았습니다. 그의 몸은 병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몹쓸 병을 견디며 선방에 누워 있었을 매월당의 자취를 이곳저곳에서 찾아봅니다. 그는 젊었을 적 명리를 좇지 않았음에도 명리를 좇았다 반성했지요. 나이 들면서도 허방에 자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이 못내 부끄러워서 “잠 못 이루고 가슴을 방아 찧듯 쳐댄다.”고 자책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김시습을 천재라 하고, 유 ․ 불 ․ 선에 통달한 호방한 문사로 칭송하지만,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절대 고독에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지옥이었을까요?

지옥 같던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미타는 ‘한량없는 수명, 한량없는 광명’, 무량수불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한량없는 생명과 빛으로 살피시는 자비로운 부처. 전생에 법장비구였지만 48가지 서원으로 수행하여 서쪽 저 멀리 정토에서 이미 설법을 하고 계시는 부처이지요.

매월당이 이곳을 찾았던 건 마음속에 간절히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가 굳이 추운 관동을 떠나 따듯한‘서쪽’을 찾은 이유가 인간적입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로의 조형미가 사라진 조선에서 초기 부도 형식인 팔각원당형을 따른 꽤 근사한 것이었다. 하대석에는 연꽃이, 중대석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는 죽은 뒤 유언대로 화장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나 장사 지내려 관을 열어보니 시신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부처가 되었구나 싶어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김시습의 부도 앞에서>
무량사 아래 마을 왼쪽 무진암 가는 길목에‘오세 김시습’부도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여러 승들의 고만고만한 부도들 가운데 그의 부도 앞에서 잠시 애도를 표합니다.

김시습이란 이름이 교과서에 오르내려도 정작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읽은 건 서른이 넘어서였습니다. 그가 당대의 모순에 찬 현실을 비판하며 방랑을 일삼았다고 배웠던 터라 조금 실망하기도 했었지요.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 모두 죽은 이와의 사랑, 인연 이야기로 비쳐졌지요. 박지원의 <호질>이나 <양반전>의 거침없는 비판의식을 기대했던 터.

그러나 다시 곱씹어 보면 결국 죽음으로써 맺어진 저세상이 현실보다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역설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비판 정신도 방식도 시대마다 개인마다 달리 나타나는 것이로구나, 생각되네요. 또 어찌 보면 유불선을 넘나드는 김시습의 사유가 정말 호방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정각의 김시습 영정. 비단에 채색. 조선 전기의 영정으로 가채하지 않은 원본이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매월당집>에 자화상이 두 폭이 있었다 하는데 이것이 김시습이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꽉 다문 입은 쓸쓸하고 눈빛은 형형하다.

<이 시대의 김시습은 있는가?>
김시습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들은 후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잠(雪岑)이란 이름의 승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며 다녔습니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는 세상에 그것이 순리라 믿는 대소 관료들……. 변절이 변절이 아닌 세상……. 그의 절개와 명분은 치기어린 똥고집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겠지요.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는 제멋대로인 인간으로 여겨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광인(狂人)의 경계에서 애초의 자신을 붙잡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은 도달하기 어려운 삶. 그래서 권정생 선생은 거지로 살기가 힘들다고 했죠.

물론 매월당의 방식이 아닌, 전투적으로 싸워서 세상과 화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도 사실은 ‘굴복’이 ‘화해’로 변명되기도 하는 세상에서, 그의 삶은 영원한 화두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김시습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가지 못하는 길이지만, 율곡의 표현대로 김시습은 ‘백세의 스승’이기에 또 다른 김시습이 있지 않을까, 지금도 김시습은 있을 수밖에 없다, 무량사를 떠나며 생각해 봅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 가는 길.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 아름다운 만수산의 속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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