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미륵리사지의 석불에 대한 몇 가지 궁금증

                                                                                                    글:하늬바람~


      

♠ 마의태자가 조성한 미륵부처가 맞나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래서 저항군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가서 마지막까지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경상도를 벗어나 북쪽으로 가자면 하늘재(계립령)을 넘어야 합니다. 미륵리 절터는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어 내려와서 다시 지릅재로 올라가는 움푹 파인 분지에 아늑하게 파묻혀 있어요. 하여 이곳에 머물며 누이가 조성했다는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며 북향하여 절도 짓고 부처님도 건립했다는 거지요.

그러나 결론은 “아니다”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거대한 미륵부처의 양식이 통일 신라 시대의 것이라고 보기엔 수준이 떨어지고, 고려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가 이 지역에서 세력을 도모해 보고자 애썼던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보게 되네요. 아버지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여 개인으로서는 비교적 행복한 일생을 살았지요. 그의 항복이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비롯되었다며 사당을 지어 경순왕의 혼을 모시기도 했답니다. 과연, 누구의 길이 옳았을까요? 왠지 이곳에 오면 마의태자의 쓸쓸한 최후에 가슴이 아프네요.

      덕주 공주가 세웠다는 덕주사의 마애불

♠ 왜 북쪽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마의태자 설이 맞지 않다면? 이곳 중원 사람들은 후고구려가 이 지역을 통일해 주기 바랐던 것입니다. 사실 중원 땅은 돌아가며 고구려와 신라의 땅이 되었지요. 충주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세운 중원고구려비와 신라가 세운 중앙탑이 서로 지척에 있습니다.

그 세력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고려 초기, 이 지역 사람들은 이미 고려에 기운 판세에 세금까지 감면해 주었던 왕건에게 귀속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고려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미륵불을 조성하였겠지요. 


      석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북쪽입니다.

 ♠ 그대들의 부처님이 아닌 우리들의 부처님
  
- 거대하기는 하나 못생긴 부처님!

미륵리 절터의 석불(보물 96호)도 미남자는 아니네요.
거대한 원통형 화강암 덩어리 넷을 쌓아올려 조각한 부처님은 머리엔 보개를 쓰셨습니다. (모두 다섯 덩어리라 주장하는데, 아무리 봐도 제 눈엔 네 덩어리!) 몸통은 세월과 화마의 흔적 때문인지 돌 색이 검은데, 얼굴은 신기하게도 유난히 하얗습니다. 표정은 단호하면서도 자비롭습니다. 그런데 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습니다. 약사불이 아닐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미륵불이라고 이야기하네요.

못생겼다는 것은 어쩌면 곡선미 제로의 원통형 몸 탓이 아닐까요? 신라의 부처님에게서 볼 수 있는 완벽한 비례미에 완전 반대되지요. 가분수는 기본이고요. 어깨는 여인의 어깨보다 좁습니다. 오로지 얼굴만은 신경을 써서 선을 살렸습니다.

이렇듯 고려 시대로 가면 부처님은 나라에서 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지역민의 발원을 담아 조성하기 때문에 실력이 신라 부처에 미치지 못합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충 생략하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결과 지방마다 다른 모습의, 다소 못생긴 부처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의 모습을 한 ‘우리들의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신라의 왕실에 뒤지지 않을 터, 높이 9.8미터의 거대한 화강암 돌을 쌓아올린 공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얼굴이 유난히 하얀 석불입니다.
 

♠ 절 이름이 미륵대원? 절 이름에 ‘원’자가 붙나요?
계립령은 조선 시대 문경 새재를 이용하기 전의 유일한 영남대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주요 길목에 있던 절이니 컸으리라 짐작되네요. 1977년 발굴 때 ‘미륵당초’, ‘…대원사 주지…’라 새겨진 기와와 금동제 귀면 등이 나온 것으로 보아 절 이름이 ‘미륵대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려 초에는 아주 많은 절들이 ‘원’으로 불렸어요. ‘원’은 말하자면 역이지요. 지리적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세워진, 쉬면서 식사도 할 수 있는 숙박업소를 말합니다. 이 원을 보통 절에서 운영을 하였어요. 원은 여행객의 쉼터이고, 때로는 행려병자나 빈민들을 구제하는 사업도 하였답니다.

 

 석굴 입구의 기둥 초석입니다.

전실의 초석입니다.

♠ 저 거대한 부처님이 석굴 안에 계셨다고요?

김대성이 지은 석굴암은 인공 석굴이지요. 앞에는 석불사 전각이 있었습니다. 이곳 미륵부처도 인공 석굴 안에 모셔졌습니다. 석굴을 쌓았던 흔적이 지금도 있지요. 지금보다 석굴 벽이 좀 더 높이까지 올라갔을 거고요, 지붕은 사실상 나무 전각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굴암처럼 돔 형식으로 지붕을 쌓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건 현장에 서면 저절로 느껴집니다. 석굴이 주실이라면 전실은 나무 전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높이는 석불의 가슴께까지로, 부처님은 전실의 지붕과 석굴 전각 사이에 난 창문으로 멀리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석굴 입구로 추정되는 초석이 부처님 앞쪽에 박혀 있고, 두 줄로 죽 박혀 있는 전실의 주춧돌들로 보아 전실은 옆으로 긴 장방형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마 충주 지역 사람들도 석굴암 같은 석굴 사원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조각 솜씨는 신라의 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거대한 인공 석굴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더 장엄하였을 텐데, 아쉽습니다.


※사진 중 덕주사  마애불과 북향 석불은 문화재청의 사진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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