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 사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만나러 가는 길

글: 하늬바람~ 

 

가야산 해인사는 다른 가람과 달리 축대를 쌓고 일주문을 세워 정말 수미산에 오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계단을 10단이나 올라가야 한다. 일주문의 이름은 홍하문(紅霞門). 붉은 노을이 걸린 듯 아름답다는 것일까, 아니면 상서롭다는 뜻일까. 일주문 앞에 세워진 미끈하게 뻗은 나말여초의 것으로 추정하는 당간지주가 해인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단풍이 한창 곱던 날, 해인사를 찾아갔습니다. 해인사 들머리부터 사람 단풍이 울긋불긋 가야산 홍류동 계곡 단풍이 무색할 지경. 고려대장경 천년을 기념하는 문화축전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100년간은 장경판전을 열지 않겠다는 발표도 있었지요. 유명한 아웃도어들이 호사스럽게 꽃피어도 이날만큼은 마음이 기꺼웠습니다. 중국 쓰촨성 티베트 지구의 해발 4200미터나 되는 야칭스를 오르는 라마승들의 긴 행렬이나 대장경을 뵈러 가는 이 울긋불긋한 행렬이나 마음은 서로 닿아 있는 것 아닐까요?

해인사는 법보사찰. 진리의 부처가 앉아 계신 대적광전 뒤에 고려대장경을 모셔둔 장경판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의 말씀, 그것을 새겨 놓은 경전이 저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 가까이에서 거창하게 다르마(Dharma, 법, 진리)의 빛을 구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 싶은 소박한 마음들이 가야산 깊은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단풍 사이에 우뚝 솟은 일주문을 지나 고려대장경에 한발 다가서려 합니다.

 

해인총림(海印叢林)은 사천왕문이다. 안에는 봉황문이란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가보면 왜 봉황문인지 알 수 있다. 가파른 계단 위에 해인총림이 마치 봉황이 날아가듯이 힘차게 서 있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기록으로 남은 해인사 사적>
‘해인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최치원입니다. 천재의 쓸쓸한 죽음이 바로 가야산 해인사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최치원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를 통해 해인사의 창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해인사는 애장왕 3년(802)에 순응이 창건한 사찰입니다. 애장왕과 그의 할머니였던 성목태후의 후원으로 지었다지요. 순응은 중국에 건너가 교학을 탐구하고 선의 세계에 깊이 들어간 고승으로 하늘과 땅의 도움으로 해인사를 세웠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정이 뒤를 이어 해인사 창건을 완수하였습니다. 최치원의 표현을 빌자면 해인사는‘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듯, 노을이 퍼지는 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해인사는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려 태조 때 희랑 대덕이, 조선 성종 때 인수대비와 인혜왕후(예종의 계비)의 후원으로 학조 스님이 크게 중건하였지요. 그 후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불이 났는데, 순조 18년에 있었던 중건이 지금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근간이 되는 큰 불사였습니다.

사실, 사적이란 것은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적을 통해 해인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터를 지켜왔는지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 무게감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일주문에서 해인총림까지의 숲길. 90미터나 되는 길 양옆에는 하늘을 찌르는 오래된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 수미산에 오르는 느낌이 저절로 드는군요.


해인사 창건 시 심었다는 느티나무. 1945년 죽었지만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존재감을 보여준다.

<고사목과 학사대 전나무, 그리고 최치원의 죽음을 애도한다>
해인총림 못 미쳐 오른편의 고사목은 해인사와 세월을 함께해 왔습니다. 하늘에서 해인사를 내려다보면 그 지형이 마치 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배가 흔들리지 말라고 앞에는 느티나무를 심고 위쪽 학사대에는 전나무를 심었다던가? 그럼, 느티나무가 서 있는 여기가 뱃머리일까요? 비록 고사목이 되었지만 느티나무로서 천 년을 넘게 생명을 이어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싶습니다.

학사대의 전나무는 아직도 청청합니다. 가지가 아래로 쳐져 자라는 이 나무은 최치원의 지팡이였다고도 하지요. 최치원이 학사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학이 날아와 경청했다고 합니다. 그 가야금 소리는 어떤 빛깔이었을까요?

고운은 <가야산 독서당에 적다>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바위 사이로 콸콸 치달리며 온 산에 소리쳐
  지척에 있는 사람 말도 못 알아듣겠네.
  시비 다투는 소리 들려올까 늘 걱정되어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감쌌네. (「새벽에 홀로 깨어」, 김수영 편역, 돌베개)

홍류동 계곡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고 세상과 절연한 孤雲의 고독이 담담하게 묻어나는 시. 신라는 자신을 품어주지 않았는데 그래도 왕건 등 새로 일어서는 권력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 없었던 외로운 천재. 그가 연주하던 가야금 소리도 콸콸 외로움으로 온 산에 울렸을지 모릅니다. 정말, 고운은 가야산 어느 골짜기에서 죽어 한줌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돌아갔을까요? 학사대에서 고운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해인사는 화엄경에 기초하여 창건한 절이기 때문에 법당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대적광전을 지었다. 지금 대적광전은 1818년에 중수한 것이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대적광전 위에는 대장경이>
대적광전 앞뜰에 서면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드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광활한 광야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대적광전은 크고 높고, 마당도 널찍하고 삼층석탑도 높고, 둘레에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지요.

아, 저 대적광전에 대장경을 받들고 있을 비로자나불이 있겠지.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입니다. 화엄의 주존이지요. 부처의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을 표현한 모습입니다. 왼쪽엔 지혜의 문수보살이, 오른쪽엔 자비의 보살인 관음보살이 지키는 가운데 진리는 오직 하나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해인사도(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대적광전 앞 석탑은 통일신라 양식의 삼층석탑입니다. 기단을 넓히고 높여서 원래의 탑보다 높아져 더욱 커 보입니다. 어떤 사정으로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균형이 맞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1탑 1금당 양식인데도 중앙에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도 이 탑을 정중탑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저 아래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사찰 전체의 중심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대적광전이 처음 자리에서 약간 벗어났을 수도 있겠지요. 과연, 겸재 정선이 그린 <해인사도>에 대적광전이 중층 건물로 그려진 것을 보면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 과정에서 위치도 바뀌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대장경은 진주, 남해에 분사도감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판각되어 강화 대장경판고로 다시 강화 선원사로 옮겨졌다. 남해에서 판각한 것은 몽골의 병화가 미치기 어렵고 거제에서 나무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는 1398년(태조 7년)에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한 해인사로 이운하였다. 부녀자들이 머리에 이고 소달구지에 싣고 가는 행렬은 1년이 넘게 이어져 이듬해 정종 1년까지 계속되었다.


가파른 계단 위에 팔만대장경이란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장경문’, 그리고 보안당. 옛 사람들은 이름 짓기를 즐겼나 보다. 장경문을 나서면 바로 수다라장과 법보전 현판. 현판을 살피는 것도 즐겁다.

<경외심으로 장경판전을 오른다>
처음부터 장경판전의 모습이 오늘날과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1448년(성종 19년)에 경판당 30칸을 다시 짓고 보안당이라 했고, 인조 때 중수했다는 기록에 비추어 볼 때 30칸(정면 15칸, 측면 2칸)의 수다라장과 법보전이 나란히 위치한 지금의 모습은 아마 조선 성종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문이 몹시도 가파른 축대 위에 있습니다. 해인사의 전체 계단이 108이라니 맨 위 계단이 108번째이겠지요. 사람들은 다르마를 구하려 가파른 계단을 오릅니다. 수다라장의 가운데가 출입구입니다. 문은 마치 종 모양을 한 곡선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처마 그림자가 생기면 마치 연꽃 모양이 된다니 수다라장을 설계한 이는 이것마저 계산한 것일까요?

 

장경판전은 모두 4동의 건물이다. 법보전(상전)과 수다라장(하전)이 남북에 나란히, 동서에 동사간고와 서사간고가 자리 잡고 있다. 자연히 가운데 직사각형의 중정(中庭)이 생긴다. 이번에 보니 배수로가 눈에 띄었다. 역시 습기에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겠다. 전체 전각의 기둥이 모두 108개라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다.(사진:문화재청)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 해서 통풍이 잘 되도록 한 점, 바닥 흙에 숯과 소금과 석회 등을 섞어 다져서 습기를 차단한 점 등 장경판전의 우수성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오늘 이곳에서 놀라운 것은 참으로 단순한 건축물이 내뿜는 경건함입니다. 무한함이 주는 카리스마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결코 위압감은 아니었습니다. 수다라장이나 법보전이나 30칸 약 60여 미터의 건축물일 뿐. 그런데도 수다라장의 문을 지나 직사각형의 긴 뜰에 서는 순간, 법보전은 마치 무한한 우주처럼 팽창하네요. 4차원의 우주가 3차원의 공간에서 다시 2차원의 긴 평면 벽으로 압축되어 눈에 들어오는 찰나에 다시 4차원으로 확대되는 느낌. 오랜 수행자라면, 시공간을 뛰어넘어 붓다를 만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없이 많은 부처의 가르침 즉, 팔만사천법문을 기록하였기에 팔만대장경이라 한다. 세계에는 30여 종의 대장경이 남아 있으나 고려대장경은 어느 장경보다 많은 경전을 포함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장경에 담긴 내용은 날마다 8시간씩 읽어도 30년이 걸리는 막대한 분량. 대장경 속엔 부처의 말씀이, 법이, 진리가 담겨 있을 테지요. 그러나 어찌 보면 그 내용은‘모든 인간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그 괴로움을 어떻게 치유하느냐’에 닿아 있다고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괴로운가? 내 안을 살피고, 나를 내려놓고, 집착을 끊어낼 때 괴로움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합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가 흔히 ‘무아지경’이라고 하는 것.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범인(凡人)으로서 최소한, 식구들, 부모형제, 친구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달라, 그런 마음을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고려대장경은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해와 달과 함께 나란히 걸리고 신들과 오묘함을 다툴 것이다.”
대각국사 의천이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것을 예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괴로움을 겪을 것이고 그때 대장경은 진리의 말씀을 전해줄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장경판전에 들어서는 순간의 경이로움과 연꽃처럼 고요히 피어오르던 감동이 고려대장경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아닐는지요. 불교 신자가 아닌 내게도 전해오는 이 마음은 종교를 초월하는 이심전심.
가야산을 물들이던 붉은 단풍처럼, 장경판전을 오르는 우리들 마음도 조용히 연꽃처럼 평화롭게 물들어 갑니다.

    청화당에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나오는 사운당 옆길은 사람들이 오가지 않아 적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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