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에서 몽양 여운형의 자취를 돌아보다(1)

글: 하늬바람~ 


여운형의 장례는 서울(동대문) 운동장에서 인민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북한산 우이동 태봉에 안장되었다.(몸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현대사의 비극적 죽음 - 분단의 시작>
북촌에 살았던 여운형 선생의 자취를 돌아보는 답사는 혜화동에서 시작했습니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 무더운 여름 공기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몽양 여운형이 한 극우 청년의 손에 암살당하였습니다. 그 죽음은 이 땅의 분단을 예고하는 가슴 아픈 비극적 죽음이었습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47년의 초여름. 김규식, 여운형이 주도하던 임시정부 수립의 희망이 좌우대립 속에서 마지막 힘을 내던 때. 하지만 이미 미국과 소련은 냉전 체제로 돌입, 회담에서 배제된 극우파와 친일파들은 정국 만회를 위해 폭력과 테러를 불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 끝내, 여운형은 싸늘한 주검으로 그를 사랑한 민중 앞에 돌아왔습니다. 광화문 인민당사에 발인한 조문 인파는 장례식장인 서울운동장까지 늘어섰습니다. 여운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눈물은 메마른 땅을 적셨습니다.  

“…인민들이여! 경각의 거안으로써 민주진영을 수호하자. 조국의 진정한 민주 재건은 멀지 않았다. 그날이 오면 그날에는 우리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여운형 선생은 우리의 선두에서 민족만대를 축복하는 귀에 익은 음성을 들려줄 것이다.”(노력인민 1947. 7. 25.)
몽양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김원봉의 추도사 중 일부입니다.  


1947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멀리 파출소가 보인다. 그 왼쪽 주유소 또는 경찰차가 서 있는 지점에서 암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운형 암살당하던 그날>
누가 몽양을 암살한 것일까요? 그 괴한의 이름은 한지근. 북한에서 넘어온 자로 나이는 21세(또는 만 18세). 성향은 중도좌파. 당시 검찰의 발표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요. 훗날 김두한은 한지근이 백의사 단원이라 했고 자신의 지시로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지요. 또 6월 28일 미군정 하지 중장이 우파 수장에게 여운형을 암살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낼 정도로 극우파의 여운형 암살 기도는 집요한 것이었으니까요.

여운형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로 들어서서 명륜동 방향으로 달려갈 때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여운형의 차 앞을 가로막자 차는 순간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때 뒤 범퍼로 한 괴한이 뛰어올라 권총을 발사. 두 번 쏜 총알의 하나는 등 쪽에서 복부로 한 발은 어깨 뒤쪽에서 심장을 관통하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조국 …조국…” 단 두 마디. 여운형은 긴급히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맥박은 꺼져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맏딸 난구 앞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나타나자 여난구는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나타났느냐?”며 소리쳤습니다. 장택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갔다지요.


여운형은 1908년부터 1914년 중국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승동 교회에 머물렀다. 그 사이 강릉 초당의숙에 가 있기도 하고, 평양신학교를 다니느라 떠나 있기도 했지만 승동 교회는 몽양의 독립운동의 출발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로구 인사동에 있다.

<승동 교회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다>
‘승동 교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신민회’와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신민회는 다양한 정치 집단이 참여한 비밀결사이지만 주로 승동 교회를 무대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신민회가 독립운동사에서 의미 있는 까닭은 초기 애국계몽운동에 방향을 가두지 않고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 그 결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독립운동의 물적 토대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승동 교회 앞에 서니 어떻게 하면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 것인가, 고민하는 여러 청년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들의 사상은 아직 미숙하고 확고하지 않을지언정 고뇌와 열정은 죽음을 각오하는 엄중한 것이었겠지요.

22살 청년이었던 여운형은 고향 양평을 떠나 승동 교회로 올라왔습니다. 선교사 클라크의 조수로 일하기로 했던 것. 승동 교회에서 여운형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시기 여운형의 활동 중 흥미로운 건 YMCA 운동부장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부였던 YMCA 야구부를 이끌고 1912년 도쿄 원정 경기를 다녀왔답니다. 문득 영화 ‘YMCA 야구단’의 송강호와 여운형이 오버랩 됩니다. 어쩐지 여운형에게 유쾌함과 스타일리쉬한 멋을 느끼는 건 이런 까닭이 아닐까요?

승동 교회. 이곳에서 독립운동의 일선에 서게 된 여운형! 어쩌면 이런 기독교적 뿌리가 여운형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적인 면모를 가지게 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승동교회에서 태화빌딩을 지나 조계사 방향으로 걸어 나오다 안국동 네거리쪽으로 꺾으면 오른쪽으로 농협중앙회 건물이 있다. 이곳이 바로 옛 조선중앙일보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에서의 언론 활동>
여운형이 1914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국내로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마흔넷, 1929년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지요. 1932년 출옥 후 그는 이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첫 길이 언론. 1933년부터 당시 3개 일간지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근무했던 여운형은 특히 연설을 잘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렇고 해방 후에도 그렇고 연설은 독립운동과 정치적 견해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라디오는 물론 신문의 보급률이라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여운형의 방방곡곡 찾아가는 연설은 매우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조선중앙일보의 보도 중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건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입니다. 1936년 8월 10일 새벽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날아오고, 여운형은 ‘손기정, 마라톤 세계 제패’라는 제목으로 호외를 내었지요. 8월 13일에는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채 사진을 내보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검열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사진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하면 동아일보가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아일보가 일장기 삭제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내보낸 것은 그 뒤인 8월 25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신문사 또한 1937년 11월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3년여의 시간이었지만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이 경험이 그 누구보다 세계정세와 현실을 전체로 통찰할 수 있는 식견을 쌓아주었을 것입니다. 아집에 빠졌던 극좌와 극우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념만 고집하지 않고 ‘너’와 ‘나’를 함께 인정할 수 있었던 마인드 말이지요.


안동 칼국수로 바뀐 여운형의 계동집 터

<여운형이 살던 계동집>
백악과 응봉을 잇는 산기슭의 남쪽 비탈에 들어선 북촌은 북에서 남으로 길이 여럿 나 있습니다. 저는 계동에서 원서동으로 이어지는 계동길을 좋아합니다. 현대 사옥에서 중앙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글쎄요, 서민적이고 옛 서울의 냄새가 함빡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목욕탕, 참기름집, 철물점, 학교 앞 서점…….

여운형의 집은 계동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현대사옥이 끝나는 지점 사거리에서 오른쪽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있습니다. 지금은 안동 칼국수 집으로 바뀌어 버렸지요. 여운형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돌이 길 건너편에 있지만 일부러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면 절대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집은 도로가 나면서 반이 뭉텅 잘려나가 버렸지요.

이 계동 집은 여운형이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를 물러나게 되자 주주들이 마련해준 집입니다. 1947년 암상당할 때까지 살았으니 11년 동안이나 살았던 집이 되는군요. 그러나 지금은 안동 칼국수 집에 국수 먹으러 오는 이들 중 ‘여운형’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도 흔치 않을 터, 계동집에서 여운형의 체취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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