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에서 몽양 여운형의 자취를 돌아보다 (2)

글: 하늬바람~



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설치되었던 계동 임용상의 집. 그 터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우리 손으로 우리 나라를 세우자>
‘도둑처럼 해방은 찾아왔다.’고 표현한 것처럼 갑작스러운 해방. 그럼에도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밤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1년 전부터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 왔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몽양의 간곡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송진우 등 우익 세력의 건준 불참. 그들은 겉으로는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친일파와 지주들이 중심이 되었던 우익은 좌익에 대한 심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동안 축척해 온 땅을 토지개혁으로 잃을까 봐 좌익과 손을 잡지 않으려 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도 비타협적 투쟁을 견지했던 민족주의자들과 우익 진영은 건준에 참여하였습니다. 김규식, 안재홍 같은 이들이지요.

이렇게 좌우가 함께 참여한 건국준비위원회 본부는 북촌 계동길에 있던 임용상 가옥에 설치되었습니다. 현대사옥 주차장 맞은편에 새로 지어진 2층 건물. 낡은 한옥이 남아 있는 이 골목에서는 좀 튀는 건물입니다. 옛 건물은 당시로서는 꽤 운치 있는 흰색 2층 양옥이었다는데…….

이 계동길엔 해방 공간의 좌우 지도자의 집도 많았습니다. 여운형 옆집은 좌익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홍증식의 집이었고, 지금 계동길 입구의 한정식 집 산내리는 한학수의 집으로 이 집에서 원세훈, 홍명희. 김병로 등이 모여 우익 대표 정당인 조선민족당 발기인 총회를 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골목에 좌우가 함께 모여 있었던 것.

하지만 이곳엔 흔한 표지돌조차 없군요. 현대사의 잃어버린 반쪽! 여전히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쓸쓸합니다.

 

현대 사옥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휘문고등학교가 있었다. 민씨 척족이자 친일 부호의 대명사인 민영휘가 세운 학교. 1938년 휘문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감격에 찬 해방 연설>
8월 16일 건국준비원회를 결성한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해방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의 현대 사옥 자리. 흰 모시 반바지에 양복을 입은 여운형. 희끗한 콧수염이 인상적입니다. 몽양은 조회대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 연설이야말로 몽양의 정신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낙원’과 ‘합리’ 이 두 단어가 절절하게 다가오네요. 적어도 친일파를 배제하고 우리 민족의 민주 정부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너무도 소박하고 합리적인 소망이었지요. 그러나 미․소에 의해 나뉜 삼팔선과 군정은 합리적인 수순을 헝클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의 연설을 들으면 해방의 감격과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헌법재판소 자리에는 개화파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이 있었고, 외아문과 광혜원(후에 제중원)이 들어서기도 했었다. 그 뒤 제중원이 이사를 가자 1910년에는 경기여고의 전신인 한성고등여학교가 2층 목조 건물을 짓고 이전해 왔다. 경기여고는 1945년 10월에 정동으로 이전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가 갈 길>
참으로 격동의 계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더운 8월의 날씨만큼이나! 8월 16일 결성된 건준은 8월말에 145개 지부를 설립할 정도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9월 3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건준에 참여하면서 집행부를 장악하고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바로 경기여고 강당에서. 9월 8일까지 이어진 대회에서 건준은 ‘발전적 해소’라는 명목으로 해체되고 대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했습니다.

건준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재편되고, 중앙은 조선공산당이 주도하게 되자 안재홍 등 중도 우파로 분류되는 정치세력들이 인공을 떠나 버렸습니다. 9월 8일 미군이 입성하는 것에 앞서 조속히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건준의 섣부른 인공으로의 전환은 앞으로 이어질 좌우대립을 예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을 비롯하여 내각 명단을 보면 좌우가 총망라된 좌우연합 정권이었지만 사실상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 우익계 인사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인공은 반쪽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어떤 정치세력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군정이었지만, 건준이 좀 더 많은 정치세력을 참여시키며 나아갔다면 어땠을까, 또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해방기 여러 정치 세력들의 집회 장소이기도 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여운형은 이곳에서 1945년에 조선인민당, 1947년에는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근로인민당 창당은 제2차 미소공위를 재개하면서 좌우합작을 이끌어 가기 위한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석조전은 덕수궁의 양관이라고도 한다. 수옥헌(중명전), 정관헌 등과 함께 지어진 서양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 도리스 기둥에 18세기 유럽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어떻게든 단독정부가 아닌 독립정부를 세워야>
“우리가 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 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이런 발언을 놓고 보면 여운형은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선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임시정부 수립을 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연다는 것,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최장 5년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이 그 주요 골자였지요.

사실 신탁통치 안을 낸 건 미국이었는데도 소련의 주장대로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동아일보 오보가 나가고 전국은 신탁통치 반대의 열기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어 모스크바 삼상회의지지 운동의 맞불도 붙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운형과 김규식 등 이른바 중도 좌․우파는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게 우선이며 신탁통치 반대는 그 다음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죠.

덕수궁의 석조전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곳입니다. 1946년 3월 제1차,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트루먼 독트린을 계기로 냉전으로 치닫던 두 나라의 관계처럼 사실상 미소가 공동으로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일까요?

여운형은 어떻게든 좌우합작을 이끌어 내어 통일정부를 세우려 온몸을 던져 헌신하였습니다. 네 차례나 38선을 넘나들며 남북, 좌우의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온갖 비난을 감수했지요. 그러나 독립을 향한 몽양의 꿈은 헤게모니 투쟁과 더러운 술수가 판치는 정국에서 너무나 순수한 것이었을까요? 45년 8월 18일 이후 여운형은 열 번도 넘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여운형은 민중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념에 갇히길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알았던 것은 강대국들의 의중을 완전히 배제하고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는 것. 그러한 주변 정세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꿰뚫어야 한다는 것. 우리 인민들은 스스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길을 간 여운형을 민족주의자라 하면 그런 것이고,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그런 것이고, 중도 좌파라 하면 그런 것이겠지요.
 

8월 16일, 해방 연설을 하기 위해 휘문중학교로 들어서는 여운형(몽양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여운형의 뜻> 
이 땅의 분단은 미·소가 만나 지도에 38선을 그은 때부터 시작되어 여운형의 죽음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몽양이 암살당한 지 65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냉전 대결을 통해 굳어진 분단 정부의 대립은 여전히 깊습니다.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고 우익의 대변자였던 김구마저 빨갱이로 매도되던 해방 정국과 지금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여운형 이후 이 땅엔 문익환 목사가 통일운동에 나섰고,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가 38선을 넘어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고자 했지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흘러서 2005년, 2008년이 되어서야 여운형은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전엔 여운형이란 이름 석 자는 금지어이기도 했지요.

우리에겐 아직 여운형이 필요합니다. 해방 후 다수의 민중이 선택했던 지도자. 그의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 용기, 편협하지 않은 열린 사상……. 여전히 여운형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힘으로, 전쟁으로 통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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