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정겨운 한옥 골목길

글: 하늬바람~


<북촌엔 보이지 않는 역사가 존재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동네를 북촌이라 일컫습니다.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의 양지바른 남쪽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지요. 남쪽으로 흘러가는 네 개의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마을은 종로와 청계천의 윗동네라서 북촌이라고 합니다. 삼청동, 가회동, 안국동 그리고 사간동, 계동, 재동 등 참으로 귀에 익은 동네들이 다 북촌에 있는 동네들입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올라와 서울 변두리에서 자란 저로서는, 오늘날 강남 청담동이니 대치동이니 하는 이름에 살짝 질시의 감정을 가지는 것처럼, 그 동네 이름들에 묘한 감정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임금님 옆 동네라 삼정승을 비롯하여 벼슬살이를 했던 조선의 이름난 권문세가들이 거진 이곳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1906년의 호적조사에서도 무려 43.6%가 양반과 관료들이었다는군요. 이름 짜한 그들 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데 일조한 친일파였던 민영휘 같은 민씨 일파도 있으며, 거꾸로 만해 한용운, 월남 이상재 같은 독립 운동가들도 북촌에 거처를 두기도 했더군요.
 
 

 북촌 4경 골목에서 본 기와지붕

그럼, 북촌의 나이는? 이곳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겠지만, 조선의 건국과 역사를 함께했으니 600살도 넘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600살 먹은 흔적은 거의 찾기가 힘들지요. 도시화에 따라 옛것이 내몰림을 당했던 것처럼 북촌의 옛집들과 길도 허물렸으니까요. 하여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과 집들은 대개 ‘성삼문 집 터’, ‘김옥균 집 터’ 같은 표지석으로 남아 있지요. 그래도 ‘보이지 않는 역사’를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더군요.

그리고 우리의 전통 한옥은 아니지만 생활 한옥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서 ‘옛 정취 묻어나는 동네’로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북촌!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옥의 지붕과 처마와 골목이 어우러져 푸른 하늘에 ‘철썩철썩’ 파도를 그리고 있지요.
 

이렇게 담장가에 심어 놓은 나무의 붉은 열매가 초겨울 햇살을 머금고 골목을 환하게 밝힌다. 주인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지금의 아파트 붐처럼 북촌에 불어 닥친 개발의 붐>
지금으로부터 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1930년 무렵에 지금의 한옥들이 지어지기 시작하였지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관직을 잃은 북촌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워졌지요. 또 일제 때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일어나면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종의 건설 회사들이 등장하여 집을 지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건양사와 경성목재, 대창생업주식회사 같은 회사가 이름난 회사였습니다. 그들은 북촌의 큰 집 한 채를 허물고 그 땅에 몇 채의 집을 지어 파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지금의 미음자(ㅁ) 모양의 오밀조밀한 한옥 밀집 지역이 되었습니다. 타일도 쓰고, 유리도 쓰고 살기 편한 집을 지어, “학군도 좋다, 교통도 편리하다” 광고를 하였지요. 그렇게 지어졌던 한옥들 중 가회동 31번지와 11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집장사들의 상술엔 참 변함이 없네요.

그 뒤로도 관 주도의 한옥 보존 정책과 자율화 정책이 엇박자를 내기도 하였지만, 2001년 이후 주민들의 ‘북촌 가꾸기‘가 진행되고 있다니, 옛것의 아름다움이 이제 정서로 자리 잡고 있구나, 생각해 봅니다.

비록 담장이 있긴 하나 사랑채와 안채를 이렇게 내외문으로 구분하였다.  

<북촌문화센터로 바뀐 민형기 집엔 특별한 내외문이…>
조선 말 세도가였던 탁지부 재무관인 민형기의 집이었다고 하는 한옥. 1921년에 지은 집으로 근대 한옥의 건축술이 잘 담겨 있는 집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세도가의 집치곤 소박하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아마 솟을대문이 아닌 평대문이어서 그랬을까요?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북촌에서 편안하게 한옥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곳은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한 내외문이었어요. 안채로 들어가는 문과 낮은 담장, 그 담장 끝에는 문이 하나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아니라 가림막일 뿐이지요. 사랑채와 안채가 툇마루로 이어져 있는데, 정말 가림막 하나로 공간을 구분해 놓았네요.

뒤 행랑채를 전시관으로 꾸며 놓은 것도 좋은 아이디어. 행랑채의 광문인가요? 잘생긴 거북이를 조각하여 붙여 놓았습니다. 왠지 그 거북 하나로 건물의 격이 달라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네요. 작은 전시관엔 북촌의 역사와 간단하게 우리 한옥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소개도 되어 있습니다. 

정독 도서관은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 가고 들어선 도서관이다. 그런데 뜰에 기무사 터에 있던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을 옮겨다 놓았다. 종친부는 조선 역대 왕들의 족보인 어보와 어진을 보관하고, 왕실의 의복, 종실제군의 봉작, 관혼상제 등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마지막 가을 단풍에 종친부 건물이 마치 단풍 든 것 같다. 겸제 정선은 여기 정독 도서관 자리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한다. 그만큼 절경이며, 길지였던 것인가? 이곳엔 조선 초기의 성삼문 집이 있었고, 400년 뒤에는 개화파 김옥균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의 결기를 도서관의 젊은이들이 배우면 좋겠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문화재청 사진 참조)

화개길. 그날도 연인들이 걷고 있다. 

<꽃이 피었나요? 화개길을 걸어요>
남북이 아니라 동서로 이어진 북촌 길을 걸었습니다. 삼청동 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내려가니 정독도서관 들머리가 보이네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추억 하나를 묻어두지 않았을까요? 이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난 좁은 골목을 접어들면, 마치 외국의 어디를 걷는 느낌입니다.

이 길 이름은 화개길, 동네 이름은 화동이라 해요. 무슨 화냐고요? 꽃 화(花)이지요. 꽃이 피는 거리. 정말로 이곳에 궁중에서 쓰는 꽃과 과일을 관장하던 장원서가 있었어요. 이곳에 아주 너른 터를 가지고 과일과 나무를 기를 수는 없어서 경원(京苑)과 외원(外苑)을 바깥에 두었지만, 그래도 일종의 식물원과 같은 일을 했으니 아마 이 일대가 꽃이 피고 지는 곳이었겠지요? 그런데 장원서 관리들이 왕의 구미에 맞게 동백이며, 장미며, 특히 일본철쭉을 구해 가져다 바친 왕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연산군이라고 합니다. 광기 어린 생애와 꽃이라? 연산군은 붉은 꽃에 자신의 어떤 마음을 담고 싶었을까, 왠지 영화 ‘왕의 여자’에서 장녹수의 품을 파고들던 연산이 떠올라 마음이 쓸쓸해졌습니다.

지금은 커피 가게, 구두 가게, 액세서리 파는 가게에 조그만 전통 공방까지 들어선 길로 이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인 향이 꽃을 피우는 거리가 되어 북촌을 찾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골목길 끝에 우뚝 솟은 북악이 정답게 내려다보는 길,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걸으면 추억이 될 거리입니다.

여기선 왕이 사는 궁궐도 눈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다. 백악의 봉우리 저 아래 경복궁이 있다. 삼청동 길가에 남아 있는 한옥의 ㅁ자형 지붕도 북촌에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북촌 5경에서 올려다본 가회동 31번지 골목길
 

<북촌 한옥의 절경, 가회동 31번지 골목>
가회동 31번지 골목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봅니다. 적어도 한옥이 아닌 주택이라도 마당 있는 집에서 자란 이들이라면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을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올리는 그런 풍경입니다. 누구나 이런 골목에서 자랐기 때문이겠지요. 여기가 북촌 5경입니다.

처마들이 줄지어 올라가네요. 하늘에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마치 기러기 떼가 창공을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 같겠지요.

더러는 당호를 단 집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충한재(沖閒齋). 한가로움을 즐기고자 하는 집주인의 생각이 엿보이네요.

기와의 물매가 낮은데 처마 길이도 짧으니 처마마다 옥색 양철 물받이를 둘렀습니다. 처음엔 왜 저리했을까, 불편한 마음이었지만, 1930년대 한옥을 짓되 좁은 터에 오밀조밀 짓자니 이리 되었겠구나 짐작이 되더군요. 그래도 이 골목의 집들은 ‘하늘과 따스한 햇살’을 선물 받은 집다운 집들이었습니다.
 

북촌 6경에서 내려다본 가회동 31번지와 남산 

<여기가 서울 한복판임을 실감하며>
거꾸로 31번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곳이 서울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고 고층 빌딩숲도 보입니다. 북촌이 그리운 고향처럼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저 빌딩들 때문일 것입니다. 작별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 같은 사이. 끝까지 가슴 아픈 이별이 없기를 바랍니다.


새 대문으로 개량한 집들도 더러 있지만 색 바랜 오래된 대문이 좋다. 이런 집 초인종을 누르면 아는 사람이 나올 것 같다. 참, 그렇다! 우리 한옥의 문은 바깥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는 문. 복과 마음을 가지고 들어간다. 어렸을 때 나는 저런 나무 대문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책상은 100년도 더 된 외갓집 대문으로 짠 것이다. 늘 다정한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본 가장 다정했던 부부로 기억하는 두 분, 책상에 앉을 때마다 나는 두 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풀 방구리 드나들 듯 그 대문을 드나들었던 기억!

돌 화분에 심어 놓은 꽃양배추가 정말 꽃처럼 화사하다.

<한번쯤 살고 싶은 양지바른  동네>
북촌나들이 끝에 다음엔 북촌에서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방들 중 끌리는 곳 아무 데고 문 열고 들어가 앉아 무엇인가를 정성껏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차 마시는 뜰에서 벗들과 이야기꽃을 피워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북촌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을 좇아 역사의 여러 조각들을 퍼즐 맞추기 하듯이 이어 붙여 보아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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