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 팀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와 둔황에 가다(1)

 글: 하늬바람~

오늘 우리 불사조 팀은 낙타를 타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실크로드와 둔황전>에 갔습니다. 물론 진짜 낙타는 아니에요. 낙타는 한 시간에 6킬로미터를 가니까 보통 우리들 걸음보다 아주 빠른 편은 아니라 요리조리 실크로드를 꼼꼼히 살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의 교통수단인 낙타는 사막 도시를 갈 때는 꼭 필요하답니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과 타림 분지를 지나다니는 낙타는 봉이 두 개 불룩 속은 낙타. 낙타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200kg 이상을 지고 걸을 수 있어요. 발바닥이 뜨거워도 견딜 수 있도록 두껍고, 모래에 빠지지 않도록 넓적하거든요. 물을 한번에 100리터를 마실 수 있어서인지 꼬박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걸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낙타에 타지 않아요. 대상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팔 물건과 물과 먹을 식량, 일용품들이거든요. 하지만 뭐, 우리는 실을 게 없으니까 그냥 낙타를 타기로 합니다.




실크로드는 언제 생겼을까요? 실크로드를 개척한 사람은 한나라 무제예요. 그러니까
기원전 2세기부터 14세기경까지 실크로드가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초원길로 넘나들었지만요.

서역으로 가는 출발점인 둔황이 중국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한나라 때랍니다. 본래 둔황 일대는 대월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흉노가 세력을 뻗쳐 와서 월지는 서쪽으로 쫓겨났지요. 한 무제는 월지와 힘을 합쳐 흉노를 칠 계획으로 기원전 138년, 장건을 보냈어요. 장건은 흉노에게 잡혀 10년간 고생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월지를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월지는 오아시스 땅에서 평화를 되찾고 이미 흉노에 대한 적개심 따위는 접은 상태였어요. 장건의 출정은 실패했지만, 서역에서 비단이 인기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장건이 갔던 길은 실크로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실크로드는 크게는 초원길, 바닷길, 오아시스길을 다 포함하여 말하지만, 좁게는 오아시스길을 뜻하기도 해요. 이 길은 서쪽의 로마, 동쪽의 장안(시안)까지 이어지는 12,000km의 먼 길인데,‘실크로드’란 이름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볼 유물은 주로 카슈가르와 둔황 사이의 3개의 길, 천산북로, 서역북로, 서역남로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목 민족의 유물 사슴 구리거울, 동제 고리, 괴수가 호랑이를 무는 금장식

우리가 오늘 가는 오아시스길의 도시에는 사막과 초원 지대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도 있어요.이들은 독특한 유목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주로 톈산산맥 북쪽을 지배했던 흉노족들도 유목민들이지요. 이들은 특히 기원전 2세기에 톈산산맥의 남북을 장악하고 중국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대요.

우리가 스키타이라고 부르는 유목 문화는 동물 문양 양식이 큰 특징이에요. 청동거울의 손잡이가 뿔 달린 사슴으로 되어 있어요. 몸에 매달아 가지고 다녔던 이 거울에서 주목할 것은 사슴뿔! 스키타이 유목민의 상징! 경주 금관도 떠오르네요.

앗, 저건 후프? 동제 고리를 보고 소리쳤어요.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얼굴은 호랑이 같기도 하고, 귀가 쫑긋한데, 날개가 달렸어요. 몸은 용 같기도 해요. 이렇게 여러 동물을 뒤섞어 놓은 것은 유목 문화의 특징입니다.

몸은 용인데 부리와 발톱은 매처럼 생긴 괴수 한 마리가 호랑이의 목덜미를 꽉 물고 있는 금장식도 마찬가지. 호랑이는 “항복” 하면서 꼬리를 내렸습니다. 투루판에서 나온 거예요.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들은 집을 꾸미는 데는 투자하지 않고, 이동시 필요한 물건과 몸과 말을 꾸미는 데 이런 동물 장식을 했다고 해요.


당삼채 낙타와 서역인 인형.캐러밴의 대표는 역시 소그드인

소그드 사람들은 실크로드를 오가며 장사를 했던 대표적인 상인들입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일대에 사는 민족인데 그들은 타고난 천재 상인들이었어요.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손에 아교를 쥐어준다’지요? 그들은 주요 도시마다 소그드인 타운을 만들고 정보를 주고받았답니다. 오늘날의 인터넷망을 구축한 거지요.

뾰족 양모 모자에 높은 콧날과 긴 옷과 장화… 어디서 봤더라? 맞아요, 7세기 신라 경주 황성동에서 출토된 서역인 토우와 똑같아요. 소그드 사람들이 얼마나 멀리까지 장사를 다녔는지 알 수 있겠어요.

소그드인들을 비롯하여 서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낙타 부대를 이끌고 다닐 때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리 안대! 구멍 송송 뚫린 저 안대는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아 주었을 거예요. 선글라스로도 쓸 수 있었다는 이 안대는 투루판의 아스타나 고분에 묻힌 사람의 눈 위에 놓여 있었던 거래요. 평소에 아끼던 안대였을까요?

 

 우전국에 시집오는 공주의 모자를 한 시녀가 가리키고 있다.

비단이 전해진 길이라 ‘실크로드’이니까 비단에 얽힌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정말이지 워낙 비단이 인기가 있다 보니 서역의 오아시스 나라들은 비단을 직접 만들고 싶었습니다. 가장 먼저 성공한 나라는 호탄 왕국(우전국)이었습니다. 본래 호탄에선 좋은 옥이 많이 나서 중국은 옥 값을 비단으로 치렀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호탄 왕은 중국 황실과 혼인을 맺어 비단 생산 기술을 알아내려 했습니다.

왕은 공주를 맞이하러 갈 사신에게 “우리나라는 비단을 만들 수 없으니, 공주가 직접 비단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라고 공주에게 전하라 했지요. 남편이 될 왕의 말을 존중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비단옷을 못 입을까 두려워서였을까요? 공주는 모자 안에다 누에와 뽕나무 씨앗을 숨겨 왔지요. 그리고 호탄 사람들에게 비단 짜는 기술을 가르쳤답니다.

설화에 나오는 그 공주 덕분에 중국의 비단은 더욱 업그레이드가 될 수 있었어요. 중국 비단은 날실(경사)로 무늬를 넣는 경금이었어요. 그런데 호탄을 통해 비단 짜는 기술이 페르시아로 전해지면서 페르시아는 씨실(위사)로 무늬를 넣는 위금을 만들어 더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을 짰어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죠? 페르시아 비단은 다시 중국으로 전해져 중국도 질세라 씨실로 무늬를 넣어‘당금’이라는 중국 위금으로 발전하였답니다.

문화와 기술의 발전은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더욱 발전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스타나 고분에서 나온 복희여와도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죠. 이번엔 사막 사람들의 무덤도 소개가 되었습니다. 소그드 사람들의 납골함, 누란 샤오허 묘지의 배 모양 관도 왔고, 투루판의 아스타나 고분 안에서 나온 그림과 인형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고구려 고분 벽화와 비슷한‘묘주 생활도’가 있어서 신기했어요.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처럼 잘 살기를 바랐던 투루판 사람들은 중국을 동경하여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많이 그렸답니다.

그중 복희와 여와는 중국 창조 설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그림이 두 개 있었어요. 왼쪽이 이번에 온 거고 오른쪽은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래요.

서로 몸을 뱀처럼 꼬고 있는 이들은 복희와 여와입니다. 오른쪽 남신 복희는 왼손에 곡자와 추를, 왼쪽 여와는 오른손에 컴퍼스 또는 가위를 들고 왼손엔 산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복희는 문자도 만들고 사람이 먹고 사는 법을 가르쳤지요. 여와는 진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했는데 한참 만들다 지쳐서 새끼줄에 진흙을 묻혀 획 잡아당겨 뚝뚝 떨어트려 인간을 대충 만들었어요. 처음에 정성껏 만든 사람들은 이쁜이들, 대충 빚은 사람들은 바로 저처럼 못생긴 사람이겠죠?

창조신의 하반신을 꼬고 있는 뱀으로 표현하는 것은 세상 만물이 다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해요. 그런데 복희 여와 그림엔 서아시아의 영향,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도 숨어 있어요. 역시 문화가 만나 섞이고 있는 것이지요. 한번 북두칠성을 찾아봐요. 음영법을 써서 입체적으로 그린 부분도 찾아봐요. 위아래 중 어느 쪽이 해이고 달인지도 찾아봐요. 복희 여와에선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하면 재미있을 거예요.

 둔황 석굴의 이야기는 다음에! 불사조 팀과 계속 여행해 주세요~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