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 팀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와 둔황에 가다(2)
글: 하늬바람~
‘마하살타이신호품’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살타본생’맨 위 오른쪽부터 지그재그로 본다.
제국주의자들은 실크로드의 석굴의 불화와 불상들을 자기 나라로 가져갈 때 톱질에 사시미 칼까지 동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끔찍했어요. 우리는 어느덧 둔황 석굴에 닿았습니다. 둔황 석굴에도 많은 벽화가 있어요. 그중 모사한 그림 중 ‘살타본생’은 석가모니가 전생에 한 일이랍니다.
보전국왕의 세 아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굶주린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았어요. 얼마나 굶주렸으면 그랬을까요? 이것을 본 막내 마하살타 왕자는 깜짝 놀라 차라리 내가 너의 먹이가 되어 주마하고 호랑이 앞에 드러누웠지요. 하지만 너무나도 굶은 나머지 와서 먹을 힘조차 없어 하자 살타 왕자는 일부러 낭떠러지에서 뾰족한 나무로 자신을 찔러 피를 낸 후 뛰어내렸습니다. 그제서야 피 냄새를 맡은 호랑이가 살타 왕자를 먹을 수 있었지요. 갑자기 사라진 동생을 두 형이 이리저리 찾았지만 결국 시체밖에 찾지 못하고 두 형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어요. 부모님은 아들의 뼈를 수습하고 탑을 세우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희생을 했기에 살타 왕자는 부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을 거예요.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도 아름다웠어요.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의 혜초 스님이 서기 723년부터 727년까지 꼬박 4년간 서역을 여행하고 쓴 보고서예요. 이 필사본은 혜초가 직접 쓴 친필인지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첫머리와 끄트머리가 훼손된 두루마리본이지요. 혜초가 초고를 수정하여 다시 쓴 3권
짜리 책(흔히 정고본이라 하는)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답니다.
앞뒤가 잘린 이 두루마리의 총 길이는 358cm, 이번에는 60cm만 공개하고 있어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원본 보호 차원에서 이렇게 요청하였대요. 그래서‘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이라는 날짜가 적힌 부분을 펼쳐 놓았습니다.
흔히《왕오천축국전》을 가리켜 세계 4대 여행기라 하고, 실크로드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요.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혜초가 19살에 서역 기행을 떠났고, 또 이런 글을 남겼다는 사실이에요. 혜초는 부처의 발자취가 담긴 8대 성지를 찾아 구법 여행을 떠났어요. 하지만 그 길은 목숨을 걸고 가야 하는 험한 길이었지요. 우리들은 혜초가 정말 놀라운 정신력과 용기와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19살의 청년이 이룬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요.
1900년 호북성 출신 왕원록 도사가 이곳 석굴을 관리하던 중 어느 날 16호굴을 보수하려고 모래를 쓸어내었는데 벽화가 그려진 한쪽 벽에 금을 보았어요. 벌어진 틈으로 막대기를 찔러 보니 깊이 들어갔지요. 이어 도사는 흙으로 봉해진 작은 문을 발견하였어요. 연기가 틈새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어쨌든 그것이 바로 장경동이라고 부르는 17호굴입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문서들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던 중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탐험가들이 소문을 듣고 왔어요. 그 중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본 사람은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였던 프랑스의 펠리오였습니다. 그는 이미 혜림이 쓴,《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용어 85개조를 풀이해 놓은《일체경음의》를 읽었거든요. 펠리오가 단돈 500냥에 중요한 문서들을 훔쳐가다시피 했다는 사실이 속상합니다.
그런데 이 굴은 홍변 스님의 사당이었습니다. 그는 토번의 지배에 반대한 둔황인의 투쟁에 참여했던 인물로 당나라 정부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았고, 도승통에도 올라 후학들이 사당을 지어 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굴에 어째서 《왕오천축국전》이 있었는지, 아직 정확한 답은 없고 여러 추측이 있을 뿐이에요.
닝샤와 하서회랑을 지나니 실크로드의 동쪽 끝 경주에 닿았습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아스타나 고분에서 출토된 ‘격구를 하는 흙 인형’을 보았지요? 말을 타고 막대를 휘두르는 그 운동은 폴로라는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운동입니다. 그런데 경주 괘릉(원성왕릉 추정)의 무인석과 구정동 방형무덤의 모서리돌의 주인공도 격구채(폴로채)를 들고 있어요. 얼굴도 서역인처럼 생겼고요. 이건 실크로드가 장안을 거쳐 신라 경주까지도 영향을 준 루트였다는 뜻이겠지요. 신라 귀족들뿐 아니라 훗날 왕건도 즐겼다는 격구가 멀리 페르시아로부터 온 거로군요.
황금 허리띠고리도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누금세공 기술은 기원전 2,500년경에 수메르의 우르 왕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 기술이 초원길을 통해 흉노족에게까지 전해지고 흉노족을 통해 중국 한나라에도 들어왔겠지요?
카라샤르에서 발견된 것은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일곱 마리가 구름 위에서 노는 모습입니다. 곳곳에 터키석을 박고 수많은 금 알갱이와 금실을 붙여 장식했어요. 아래쪽의 버클은 1세기경 한나라의 낙랑군이었던 우리나라 평양에서 발견되었어요. 어느 게 멋진가요? 왠지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게 세련되어 보였어요. 이렇게 견주어 보니 정말 실크로드가 동서양을 잇는 무역로였다는 것이 실감나네요.
정말 지구상의 어떤 문화와 문물이 혼자서 발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몸속에 세계인의 피가 흐르는 것은 바로 실크로드와 그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전시장을 나오며 선생님은 특별히 당부하셨지요. “실크로드는 문명 교류 길이다. 그 길을 통해 문명과 문물이 전해지고, 발전하고, 사라져간다.”바로 그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창조하는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