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메이지 천황의 일생
하얀 동그라미
온 일본이 서양세력의 등장으로 경황이 없던 1867년 1월, 무쓰히토 황태자는 아버지 고메이 천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5살에 일본 122대 천황, 즉 메이지천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안팎으로 대 혼란의 시기를 마감하는 대정봉환(막부의 정치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줌)으로 무사시대가 끝나고 다시금 천황이 일본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무사들로부터 600여년 만에 정권을 돌려받은 조정에서는 이제 일본은 천황의 세상임을 알리기 위해 연호를 메이지로 정하고, 막부정치의 중심이었던 에도를 도쿄(동경-교토 동쪽에 있는 서울)로 개명 하였습니다.
<도쿄의 에도성으로 향하는 메이지 천황>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유신을 비롯한 근대적 개혁안을 발표하고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고 관리로 이루어진 이와쿠라 사절단을 외국에 파견시켰습니다. 그 무렵의 사절단은 외국에 나갔을 때 서로 자기네 왕조 최고 통치자의 사진을 교환하는 예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역대 천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선 메이지천황의 전통복 사진입니다.
<1872년 메이지 5년. 22살> 천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찍은 사진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인화를 하고 보니 안그래도 작은 몸집에 전통복 차림의 천황은 위엄은 커녕 너무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던거지요. 하는 수 없이 절대군주의 강인한 힘을 나타내고자 어깨에 각을 잔뜩 세운 군복을 입고 찍었지만 그래도 뭔가 폼이 나지 않아서 결국 그 사진은 폐기처분 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파파라치가 있었던 모양이예요. 지금까지는 1872년도의 사진이 최초의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 동경대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했는데요. 그 전해에 가나가와현의 조선소를 방문한 천황을 향해 용감하게 카메라를 들이댄 간 큰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현장에서 붙잡혀 불경죄로 필림을 몰수당했지만 그 사람은 용케도 딱 한 장을 숨겨서 자기나라, 오스트리아로 가져갔다고 해요. 그 사진이 130여 년이 지난 올 3월에 처음으로 동경대 특별전에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중앙의 하얀색의 전통복을 입은 사람이 21살의 젊은 메이지천황입니다. 그러니까 천황의 공식사진이 나오기 전의 일본최초의 황실 파파라치 사진인 셈이지요^^
해가 바뀌어 이번에는 양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숙련된 이탈리아 사진기사가 더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자꾸만 이런 저런 포즈를 요구했겠지요.
어릴때 천연두를 앓아서 입주변에 마마자국이 있는 천황은 흉터 때문이기도 하고 최고 권력자가 기계 를 멀뚱 멀뚱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신격화 되어 있는 천황을 향해 감히 일개 외국 사진사가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는 것도 명령받는 것 같아 싫었는지 사진 찍는 것 자체를 엄청 싫어했다고 합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프랑스 대제의 군복같은 양복을 입고 한 손에는 칼을 차고 소파에 깊이 앉아 높은 권위를 내 보이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뭔가 어색하죠?
10여 년이 흐른 후 천황은 일본의 군사들이 자신의 신하인 것을 만방에 알리는 군인칙유를 발표한답니다. 그리고는 조금 더 멋진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사진을 찍어요. 그렇지만 사진 찍기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그 성격이 어디 갈까요? 결국에는 얼른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초상화를 그린다음 다시 초상화를 찍어서 천황의 진영사진을 완성시켰답니다.
그러고 보니까 뭔가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리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자세도 바뀌었구요.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몇 개의 크고 작은 훈장으로 장식되어 있는 넓은 가슴. 그것으로 자신의 신민에 대한 천황의 포용력을 나타내는 상징을 삼았습니다. 엉덩이를 소파 깊숙이 푹 파묻은 모습에서 이제는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등을 곧추세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위엄을 나타냈으며 칼을 꽉 잡은 왼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제 알겠죠? 기본이 초상화였기 때문에 꼭 필요한 부분을 손으로 조금씩 뽀샵 처리하여 멋진 사진이 탄생된 거랍니다. 이 사진을 받아본 메이지 천황은 아주 기뻐했다고 해요. 그래서 세월의 흐름에 상관없이 45년의 통치기간 내내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는 초상화로 만들어져서 각 관청과 학교에 배급되어 일본 신민의 경배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한편, 메이지 천황은 승마를 아주 좋아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유모와 궁녀들의 손에서 귀하게 자란 천황은 운동부족으로 몸이 많이 허약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말을 타 본 후에는 승마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그래서인지 군대를 통솔하는 정복군주의 모습으로 비유되면서 군복을 입고 말 탄 모습의 사진이 자주 등장한답니다.
이 사진은 메이지 천황의 정실 부인인 이치죠 하루코 황후(쇼켄황태후)의 양장 입은 사진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불행한 황후의 이 사진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테이블 위에 아주 두꺼운 책이 하나 놓여져 있습니다. 과연 무슨 책일까요? 여자는 남자를 따르고 효로서 부모를 모셔야한다는 내용의 효행기입니다. 두께만 보더라도 얼마나 자잘한 부분까지 적혀있을지 알 것 같죠? 여자를 옭아매는 무시무시한 족쇄입니다. 그 옆에 살짝 보이는 화병에는 하얀 장미가 있습니다. 흑백사진이어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백장미랍니다^^. 흰장미, 그것은 순결을 상징하지요. 여자인 황후 옆에 효행기와 흰장미를 둠으로서 일본의 모든 여성들에게 여필종부와 삼강오륜을 명령하는 말없는 지시가 되는 것입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군대의 수장으로 진두지휘하던 메이지 천황. 더구나 우리역사의 뼈아픈 한일병합까지 명령했던 메이지 천황은 당뇨병의 합병증인 요독(오줌 독)으로 45년의 통치기간을 마감했습니다.
정복전쟁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가져간 메이지 천황은 1912년 7월 29일 늦은 밤에 세상을 떠납니다. 3년 후에는 자신의 아이는 한번도 낳아보지 못하고 측실의 자식(요시히토)을 양자로 키워 다음 천황(다이쇼)으로 즉위시켰던 이치죠 하루코 황후도 세상을 떠나 교토 근처의 후시미 모모야마릉에 매장되었습니다.
자국민뿐만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에까지 신민화정책을 일관했던 메이지 천황은 그 세뇌교육의 성과가 죽음 앞에서도 나타났어요. 러일전쟁의 대장군이었던 노기장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배를 갈라 자결하는 활복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수 십년 후 대한민국 땅에도 메이지천황의 귀신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일본 만주국 소위출신의 박정희(다카키 마사오)대통령이 일본 유신의 정신을 이어받아 시월유신을 만들어 낸 거죠..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도 그 귀신에 빙의되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무지 많은 것 같아요. 어디한번 인왕산 국사당에가서 큰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혹시나 일본 여행을 가시더라도 청일전쟁부터 뼈아픈 한일병합까지 전쟁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메이지 신궁에 가서 제발 에마(소원 적어놓는 나무판)에 소원 적어놓고 오지 마셔요.. 부탁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