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하늘과 길과 연애하는 날

글: 하늬바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가을날 상당산성에서는 하늘도, 길도, 단풍 든 숲도, 돌멩이도 연인이 됩니다. 된꼬까리를 지나는 급한 여울의 쿵쾅거림이기도 하고, 드넓은 백사장을 넓게 유유히 휘도는 강물 같은 사랑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성벽 길을 걸으며 연애하듯이 그렇게 상당산성을 다녀왔습니다
.

남문은 무사석 11개를 이은 홍예문이다. 어떻게 네모난 돌이 아치가 되나? 홍예문, 홍예다리를 볼 적마다 생각한다. 루의 이름은 공작루. 대부분 건물들은 영조 때 지은 것이다.


<마한의 땅에 조선 사람들이 쌓은 석성>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족보부터 따지면 좀 빡빡해 보이긴 합니다만, 웅장한 듯 아름다운 산성이여, 언제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가, 궁금합니다.

상당산성은 맑은 고을 ‘청주(淸州)’ 상령산(상당산)의 8부 능선을 따라 지어진 포곡식 산성입니다. 계곡을 끼고 능선을 따라 넓게 쌓은 성을 포곡식(抱谷式)이라 하지요. 따라서 자연스럽게 성곽이 넓은 편입니다. 사는 동안 먹을 물도 있어야 하고, 밭도 일궈야 합니다. 역시나 안내지에 따르면 둘레가 4.2km에 면적은 22여만 평이나 된답니다.

청주는 삼한시대엔 마한의 땅이었고, 백제 시대엔 상당현이라 불렀습니다. ‘상당’은 높은 무리가 있다는 뜻. 상당산성이란 이름은 백제 시대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는 서원소경, 그러다 757년에 승격하여 서원경이 됩니다. 국사 시간에 들어본 이름이지요? 청주란 이름으로 바뀐 것은 고려 때. 그리고 지금의 석성이 된 것은 조선 숙종 때.

효종 2년 어느 날, 충청도병마절도사 병영(兵營)이 해미에서 이곳 청주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청주는 중요한 고을이 되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산성으로 상당산성은 숙종 42년(1716) 충청 병사 유성추가 지휘하여 3년 동안 석성으로 다시 쌓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제 사람들이 터를 닦고, 신라 사람들이 성을 쌓고, 조선 사람들이 돌로 성을 완성한 것이 되나요?



상당산성 옛지도: 1. 공남문(남문)  2. 진동문(동문)  3. 미호문(서문)  4. 동암문과 남암문  5. 치  6. 보화정(동장대)  7. 운주헌(정청)  8. 수구 세 곳  그 밖에 포루, 서장대 등이 보인다.


<자유연애의 선두주자 김서현이 쌓은 성?>
일단 기록을 봅니다.
《삼국사기》,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음.
《상당산성 고금사적기》,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이 쌓음.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조에 고상당성(古上黨城)은 율봉역 뒤 북쪽에 석축으로 둘레가 7773척(2600미터쯤)인데 성 안에 큰 연못이 있다.
옛사람들은 구구절절 쓰는 것을 싫어하여 이리 간단한 써놓았을까요? 참 아쉬운 가운데, 아마 숙종 때 석성으로 다시 쌓기 전에도 완전 토성은 아니었지 않나 싶습니다.

 

성곽 전체에서 여장이 남아 있는 곳은 남쪽 성벽이다. 화강암으로 튼튼하게 쌓은 여장 끄트머리에 앞으로 불룩 나온 곳이 치. 꿩 치(雉)자. 제 몸을 숨기고 엿보기를 잘한다는 꿩의 습성을 따라 치라 했다고. 그러나 내 눈엔 꿩의 쭉 내민 엉덩이로 보인다.

기록 중 시선을 끄는 것은 김서현이란 이름 석 자입니다. 그는 아버지 김무력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바탕을 쌓았던 인물입니다. 629년에 고구려의 땅이 되어 버린 낭비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청주와 상당산성 바로 옆의 청원의 옛 지명이 낭성, 낭비성이라고도 했다니 역시 김서현과 무관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낭비성을 어디로 비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는 접겠습니다.) 김서현은 지금 진천인 만노군 태수이기도 했으니, 이 일대가 김유신 집안의 세력권과 관련이 있겠지요.

김서현이란 이름에 또 따라붙는 건 그가 역사에 기록된 자유연애의 선두주자였단 사실이지요. 김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마주쳤습니다. 둘은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되었죠. 하지만 만명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이었던지라 가야계의 인물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지요. 숙흘종은 딸을 별채에 가두고 철저히 감시하는데, 갑자기 벼락이 문간을 때리고 깜짝 놀란 사람들이 갈팡대는 사이에 만명은 창문으로 달아납니다. 만명은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가고 둘의 사랑은 유신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지요.
하, 1500여 년 전의 불같은 사랑이 단풍처럼 붉습니다.


동장대 보화정. 장대는 군사 훈련지 또는 지휘대. 낯선 ‘龢’자, 화(和)와 같은 뜻으로 맹자가 한 말에서 따 왔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하늘이 준 때는 유리한 지리만 못하고 지리적인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은 못하다는 것. 한마디로 백성들이여 화합하여 지키자는 뜻인 셈이다. 하긴 난공불락의 성도 내분이 일어나면 안에서 문을 열어 주는 법.

<길은 하늘로 이어지고……>
동쪽 성벽 길엔 성가퀴가 없습니다. 길은 하늘로 이어집니다. 그냥 산길을 걷는 느낌. 자연엔 직선이 없습니다. 구불구불한 선이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일까요? 그저 좋아서 걷게 되네요.

가운데 보이는 게 진동문. 걸어온 길. 우리 인생처럼 구불구불하다.

‘그럼, 상당산성에선 어떤 전투가 있었던 거지?’
청주를 비롯한 충청도 중원 지방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땅으로 뒤바뀌는 운명을 감당해야 했지만 이곳 상당산성은 공격 진지는 아니었더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지배자가 뒤바뀌는 운명은 후삼국에서도 되풀이되었습니다. 궁예 다음 견훤이 상당산성을 차지했습니다. 마지막으론 왕건이 공남문 아래 넓은 벌에 진을 쳤지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를 때 왕건은 복지겸으로 하여금 문이 없는 북쪽으로 쳐들어가라고 하지요. 결과는 왕건의 승!


동암문에 닿았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지은 문. 그러나 사람과 물자가 비밀리에 오갈 수 있도록 한 문.

<반역의 근거지 상당산성과 청주, 노론의 땅이기도>
상당산성이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의 진영으로 넘어간 적도 있습니다. 남인이었던 이인좌의 명분은 형 경종을 죽이고(당시 소론의 생각) 왕이 된 연잉군을 임금(영조)으로 받들 수 없다는 것. 이인좌가 이끄는 남인과 소론 반란군이 청주를 집결지로 결정한 것은 지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청주 지역은 우암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노론이 힘을 떨치고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지요.

1728년 3월 15일, 이들은 청주에 집결하여 충청 병영이 있던 청주성을 하룻밤에 차지하였습니다. 이때 청주 병영의 비장이었던 양덕부와 기생 월례가 문을 열어 주었다지요. 이인좌는 충청 병사 이봉상 등을 죽이고, 청주의 반란을 이끌었던 남인 신천영을 충청 병사로, 권서봉을 청주 목사로 임명하지요.
이들은 상당산성도 장악하여 군사와 무기를 모으고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민심을 얻으려 했지요. 물론 이인좌의 난은 실패. 이인좌는 죽산에서, 청주를 지키던 신천영과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는 상당산성에서 노론 의병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니, 청주는
반역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청주는 신항서원과 괴산 화양서원을 중심으로 노론의 땅이기도 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반역의 근거지에서 충신의 땅으로 대접받기도 하네요.

이럴 때 역사는 흑백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걸 실감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영조. 그에게도 어둠이 있습니다. 그에게 안겨진 노론이란 숙제, 결국 그 숙제를 풀지 못하고 세도 정치기를 맞게 되고…….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자락이 청주 상당산성에 어려 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길이 만났습니다.
오늘 상당산성의 느낌을 오롯이 말해 줍니다.
빛이 색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이름을 부르기 어려운 것!
가슴에 툭, 열고 들어옵니다.

서문인 미호문

<날랜 호랑이가 활까지 쏜다면…>
문이 없다는 것은 자연 지형 자체가 막기에 좋다는 뜻. 과연 성벽은 가팔라집니다. 멀리 보이는 곳은 청원군이네요. 북쪽 성벽에서 차차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어느덧 서문입니다. 미호문(弭虎門), 弭는 활고자 미. 동문과 마찬가지로 문은 평문. 성벽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하여 옹성의 효과를 갖도록 한 게 동문과 다른 점입니다. 옛 지도를 보니, 한자 풀이 그대로 활모양. 활을 당기는 호랑이라는 뜻인가요?


이래서 황금빛 들녘이란 말이 생겼다.

<상당산성, 거기엔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미호문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시원스럽습니다. 와, 사람들이 살고 있네. 일부러 32채의 한옥을 지었다는 한옥마을. 대부분은 음식점. 꽤 넓은 저수지는 옛날 연못은 아닙니다. 홍수로 원래 저수지는 사라지고, 1943년 일제 강점기 때 새로 만든 것. 다소 인위적인 느낌. 그러나 밭에 심은 푸른 갓과 나락 벤 논, 마당에 널어놓은 나락, 봄이라면 복숭아꽃 살구꽃 차린 동네 노래가 저절로 나왔을 정겨운 마을. 원래 산성엔 사람들이 살아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광경입니다.
왠지 마음이 좋았습니다. 낙안읍성의 마을과는 다른 느낌. 과거가 현재로 걸어 나온 느낌.

산성마을 

<친일파 민영휘와 그 자손들의 땅이었다니>
이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했던 것일까요? 상당산성 안 땅이 민영휘와 아들 민대식 등이 최초의 등기권자였답니다. 순간 머리가 띵했습니다. 14만 5천 평이나 된답니다. 명성황후의 힘을 믿고 제2의 세도정치를 하더니, 한일강제병합에 발 벗고 나서서 협조한 결과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 민씨 일파만 그랬습니까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수탈의 손길이 깊은 산골 산성에까지 미쳤었군요.

정부는 그간 그 땅을 세 차례에 걸쳐 국가에 귀속시키는 노력을 하여 2009년에야 9만 평이 나라 땅이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아직 소유권이 모호한 상태. 해방 후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흐지부지된 대가가 너무 크네요. 혹시 땅 주인 민씨가 산성마을에 살고 있지 않은지? 여전히 과거는 과거일 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인가요? 친일파 후손들, 부끄러운 조상 합리화하려 후안무치의 사유재산 보호 논리를 들이대는 짓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물가에 시든 연잎 사이로 연밥이 익어간다. 난 가을빛으로 물드는 연밥이 좋다. 아직 푸른 잎이 무성할 때겠지. 허난설헌은 ‘채련곡(采蓮曲)’에서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라고 읊었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흠, 연애시다. 그러나 연밥은 새 생명을 품어서 더 아름답다.

 

가을과 산성과 하늘 그리고 그녀의 미소. 

돌멩이 하나에 얽힌 사연이라도 이야기는 귀합니다. 야, 너에겐 이런 일이 있었구나! 가슴 아픈 사연은 보듬고, 때론 화내고, 그리고 반성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상당산성은 사실, 이야기를 압도하는 하늘과 길과 돌과 단풍 숲이 자꾸 연애하자 속삭이네요. 마음은 달뜨고, 굽이치는 길 따라 보일 듯 말 듯한 그대의 마음을 좇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상당산성 옛 지도는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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