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에서 만난 혜초, 그리고 사막의 도시와 사람들

글: 하늬바람~

 

막고굴은 둔황의 석굴. 사막 높은 곳에 있다는 뜻으로 ‘莫高屈’이지만 그보다 위대하고 성스럽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오아시스길을 오가며 거대한 부를 쌓았던 대상인들에게 부처의 가호가 필요하였고, 그 발원으로 인도석굴과 같은 석굴을 조성하였다.

쥘 베른이《지구에서 달까지》를 쓴 지 100년이 못 되어 지구인들은 달나라엘 갔지요. 우주선과 마찬가지로 타임머신에 대한 인간의 집요하고 집단적인 상상력은 아마 21세기 안에 타임머신을 현실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타임머신이 없다고 우리가 과거로 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물과 유적지를 통해서라면 시공간을 뛰어넘는 여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오늘은 당삼채 낙타를 타고 중국의 서쪽 끝 둔황을 지나 모래바람 부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길 위의 도시를 찾아갔습니다. 우리 몸속 깊숙이 새겨져 있는 노매드(nomad)의 본성을 자극하는 단어 실크로드, 둔황, 타클라마칸, 그 사막의 별, 오아시스 그리고 혜초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


주로 백색, 녹색, 갈색 세 가지 유약으로 채색을 하여 당삼채라 한다. 8세기 무렵에 많이 제작된 이 도기들은 장안(시안)에서 주로 제작되었다. 꽤 오래 전 시안 박물관에서 다양한 당삼채 도기들을 봤던 기억도 새롭다. 다채로운 색으로 승부를 하지 않는 우리 도기를 보다 참 화려하다 싶었는데, 이 또한 서방과 더불어 실크로드 옛 도시 중 미란의 문양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니 당삼채 낙타 자체가 실크로드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낙타를 타고 오아시스길을 간다>
전시관의 첫 만남은 당삼채 낙타. 왜 하필 낙타일까요? 흔히 실크로드라 하면 고대 흉노족들이 넘나들었던 초원길, 실크로드가 이슬람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끊긴 뒤 활발해진 바닷길, 그리고 톈산산맥과 쿤룬산맥 그리고 그 사이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끼고 난 세 개의 오아시스길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갈 길은 오아시스길. 사막에 드문드문 세워진 도시들인 서쪽의 카슈가르와 동쪽의 둔황을 잇는 쿠차, 카라사르, 투루판, 누란, 케리야, 호탄을 가려면 낙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서양을 오가는 대상인들에게 목숨과도 같았던 낙타. 불룩 솟은 두 개의 봉. 살짝 내리깐 긴 속눈썹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어 줍니다. 옛 사람들이 갔던 낯선 길. “함께 떠나 볼래?”
 

당삼채 서역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다. 그렇다, 7세기 경주 황성동에서 출토된 토우는 뾰족 모자를 쓴 서역인 얼굴을 하고 있다. 얼굴도 차림새도 거의 똑같다. 아마 소그드인이 신라 금성에 살았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길고 뾰족한 양모 모자에 녹색 장포를 입고, 장화를 신은 소그드인이 금성을 활보했으리라.

<진정한 노매드, 소그드인들은 문화의 전파자였다>
“소그드인은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손에 아교를 쥐어준다.”고 합니다. 그만큼 타고난 상인이었던 그들은 진정 실크로드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원래 소그드인들이 살던 곳은 오늘날의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중앙아시아의 아랄 해 부근의 소그디아나였지만, 이들은 주요 도시마다 소그드인 타운을 만들고 글로벌한 중계무역상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들은 낙타를 몰고 시안으로 들어와 서역의 문물을 전했으며, 이들에 의해 비단이 서역에 전해졌습니다. 그들의 앞선 정보력과 군사력은 각 지역의 왕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였지요. 날짜를 세가며 이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당의 귀부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그드인들은 이란계 민족인지라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땅과 불을 신성하게 여기고 시체를 매우 더럽다고 여겨 시체를 땅에 묻거나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땅과 불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소그드인들은 일종의 조장을 했습니다. 시신을 다흐마에 옮겨 놓고 새나 개가 먹도록 하였지요. 그러다 뼈만 남으면‘옷스아리’라고 하는 납골기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종교에 따라 달라지는 장례 풍습. 땅을 신성시하기에 조장을 했겠지만 왠지 죽어서도 갇히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들 같아 그들이 살아온 삶과도 부합한다고 느껴지네요.

     투루판 박물관 소장 옷스아리. 원통 모양의 흙으로 만든 관. 

누란의 미녀라고 알려진 젊은 여인의 시신이 나온 샤오허 묘지. 절세의 그 미녀는 코카서스 백인종이다. 코카서스인들이 그 후에도 이 지역에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배를 타고 죽음을 맞이하였던 누란>
그런가 하면 누란의 샤오허 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사막의 또 다른 장례 풍습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타클라마칸 동쪽에 있는 도시 누란의 옛 성터 서쪽에는 4000여 전의 무덤군들이 있습니다. 산이라고 표현하기엔 낮은, 물결치는 사막 가운데 봉긋 솟은 언덕에 삐죽삐죽 솟은 나무들. 멀리서 보면 마치 우리의 솟대와 흡사합니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배에 실려 멀리 가길 원했나 봅니다. 배 모양의 관에 시신을 넣었고 시신은 건조한 사막 기후에 자연히 미라가 되었습니다.

배에 탔으니 노가 있었야겠지요. 남자의 관 앞에는 여음상을 조각한 노 기둥을, 여자의 관 앞에는 남근상 모양의 노 기둥을 세워 두었습니다. 아마 생식 숭배 사상을 지녔던 것이겠지요. 사막 오아시스에 살던 이들이다 보니 멀리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시신이 없는 경우, 백양나무로 사람 모양의 나무 미라를 만들어 영혼을 달랬습니다. 그 정성에 감탄합니다.

문득, 바리데기가 떠오르네요. 자기를 버린 아버지 오귀 대왕의 병을 낫게 하려고 서천 서역국으로 떠난 바리공주는 어디까지 왔었을까요? 바리데기도 황천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는데, 이곳 사람들도 저승에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많은 그림들과 나무로 조각한 인형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한결같이 중국적인 요소가 강하다. 중국 창조 설화의 주인공인 복희 여와가 등장하는 것, 무덤 앞을 지키는 십이지상이나 진묘수도 그렇다.

<중국적인 것을 동경하였던 투루판 사람들>
아스타나 고분은 서역북로의 투루판에서 발견된 무덤입니다. 3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지어진 무덤들의 주인들은 그야말로 땅속에서 깊이 휴식(아스타나)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루판은 중국의 목젖이라고 하는 둔황에서도 더 서쪽으로 가야 나오는 사막 도시. 그 도시 사람들이 중국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동경하였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비단 또는 종이에 그린 병풍 세트의 그림들은 당나라 귀족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양귀비를 연상시키는 당나라의 미녀 모습이지요. 한껏 틀어 올린 머리는 꽃 장식 비녀로 꽂고, 터질 듯한 볼엔 붉게 볼연지를 발랐어요. 정말 앵두처럼 작은 입술, 보드라운 촉감이 느껴지는 비단 옷이 무덤 주인이 살아생전에 누렸을 호화스러운 일상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인의 배경엔 푸른 대나무가 보입니다. 사막 도시 투루판에 대나무가 자랄 리가 없는데 그만큼 중국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거겠지요. 무덤 주인들은 실제로 국제 도시 장안에 오갔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곳의 그림이라도 구입하여 걸어 놓고 보았던 것일까요? 장안 귀족 여인들이 입었던 옷을 수입하여 입는 게 유행이었을까요?

제 323호 굴의 북쪽 벽에 장건이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실 장건이 서역으로 떠날 땐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 그런데도 불교적으로 해석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른쪽 위는 한 무제가가 부처에게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마치 스님 같은 분위기이다. 아래엔 말을 타고 있는 무제가 장건의 출정 인사를 받고 있고, 왼쪽 위에는 장건이 서역으로 가고 있는데 멀리 서역의 성이 보인다.

<서역 개척의 역사를 버무린 둔화 석굴의 불화>
둔황 석굴 고사화 가운데 석가모니의 전생을 다룬 ‘살타본생’은 보전국의 셋째 왕자 마하살타가 굶주린 어미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부처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마치 연화화생 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은 윤회사상의 반영이겠지요? 민간 설화를 석가모니와 연결시켰기에 대중적인 호소력도 강하더군요.

그런가 하면 ‘장건 출사 서역도’ 같은 불교의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을 그린 불교사적화는 그림으로 역사의 일면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실크로드 개척은 한 무제의 흉노 정벌로 시작되었습니다. 둔황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것도 바로 그때이지요. 흉노가 둔황 일대를 차지하기 전엔 대월지가 지배하던 땅, 그런데 그만 흉노의 침입으로 월지는 서쪽으로 쫓겨났습니다. 한 무제는 월지와 힘을 합쳐 흉노를 칠 계획으로 기원전 138년, 장건을 출정시켰던 것입니다. 장건은 흉노에게 잡혀 10년 간 고생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월지를 찾아갔으나 월지는 오아시스 땅에서 평화를 구가하면서 이미 흉노에 대한 적개심 따위는 접은 상태였습니다. 장건의 출사는 실패한 것일까요? 그러나 서역의 비단에 대한 욕구를 확인했으니, 시장 조사를 성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건이 갔던 길은 실크로드가 될 수 있었지요.

주로 옥색이라고 할 수 있는 초록 계열의 색이 시원하게 다가오는 벽화들을 마주하고 있으니,‘벽 위의 도서관’이란 찬사가 공치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1908년 둔황 막고굴의 17번 석굴(장경굴)에서 발견하여 가져간 《왕오천축국전》.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문에 능통했던 펠리오는 단번에 이 두루마리 필사본이《왕오천축국전》임을 알아봤다. 이미《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용어를 풀이해 놓은 혜림이 쓴 《일체경음의》를 읽어 보았기 때문이다. 내용은 인도의 다섯 지역을 돌아본 기행기. 혜초의 처음 여행 목적은 붓다의 성지를 돌아보는 구법 여행이었다. 하지만 단지 밀교승으로서의 관심을 넘어 문명 탐험가로서의 호기심을 펼쳐 놓기도 하였다. 앞뒤가 잘린 이 두루마리의 총 길이는 358cm, 이번에는 60cm만 공개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이라는 날짜가 적힌 부분을 펼쳐 놓았다.

<붓다를 향한 원대한 사랑으로 쓴 왕오천축국전>

서기 723년부터 727년까지 꼬박 4년간 서역을 여행하고 쓴 보고서 《왕오천축국전》. 저기에 신라의 청년 승려 혜초의 혜안과 눈물과 청춘의 기록이 담겨 있구나. 펠리오가 장경동에서 발견한 이 필사본은 혜초가 직접 쓴 친필인지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게다가 첫머리와 끄트머리가 훼손된 두루마리본이지요.
혜초가 초고를 수정하여 다시 쓴 3권짜리 책(흔히 정고본이라 하는)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 
혜초가 석가모니의 발자취를 따라 죽음을 넘어 걸었던
그 자체가 고행이고 수행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1300여 전의 사람을 만난다는 게
경이롭기조차 합니다.

흔히《왕오천축국전》을 가리켜 세계 4대 여행기라 하고, 실크로드 길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요. 하지만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은, 혜초가 19살에 서역 기행을 떠났다는 사실이에요. 도대체 무엇이 이 청년을 먼 서역의 땅으로 이끌었을까요? 자신에 대한 성찰의 욕구가 크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속에 우주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없었다면 그 길을 떠났을까요? 부처에 대한 원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죽음을 넘을 수 있었을까요? 1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그 고귀한 정신을 보여주러 온 혜초의 기록 앞에서 진심을 다해 합장합니다.


황남대총 등 5, 6세기의 경주 고분에서는 로만 글라스라고 부르는 유리그릇이 나왔다. 나아가 서역의 영향을 받은 문양과 조각은 9세기까지 이어졌다.

<경주에서 만나는 실크로드의 발자취>
둔황을 떠나 시안에 이르는 하서회랑 길을 지나면 어느덧 경주까지 실크로드가 이어집니다. 그 당시 당의 수도 장안은 세계의 모든 종교와 문물이 모이는 시장이자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었지요. 8세기말에 100만 명을 육박하는 대도시였으니 장안에서 신라의 구법승이나 유학생들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듯싶습니다. 당연히 신비로운 서역 문물은 먼 동쪽의 도시 경주까지 찾아왔겠지요.

안압지에서 나온 포도넝쿨무늬 암막새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양입니다. 고려 시대에 들어서야 포도가 재배되었다는데, 양각된 포도덩굴무늬가 정교하고 세련되었습니다. 지극히 신라적인 암막새와 페르시아 풍 무늬. 문화의 수용과 변용, 열린 감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군요. 그리고 출구 옆에 놓여 있는 괘릉의 무인상과 구정동 네모난 돌방무덤 모서리 기둥의 폴로(격구) 채를 들고선 서역인을 보고 있노라면, 신라인과 어울려 한바탕 놀았을 운동장의 소란스러움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4, 5세기에 지어진 둔황 막고굴의 제275호 굴의 미륵보살상. 오똑한 코와 미소 짓는 입매는 서역인의 얼굴, 옷 장식 등은 중국적이다. 우리의 부처와 달리 교각을 하고 있는 다리도 특징적. 동서양의 불교 예술이 융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륵보살의 환한 미소가 실크로드를 돌아보는 나의 뒤를 끝까지 비추어 주었다.  

이렇게 실크로드를 따라 사막 사람들의 삶과 생각의 흔적을 느껴 보았습니다. 실트로드란 이름답게 비단은 동서양을 오가며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구법승을 비롯해 대상인들과 함께 한 부처의 사랑도 아직 벽화와 불상 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슴과 호랑이, 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문양에서 열악한 사막과 험한 산맥, 그리고 초원 지대를 넘나들었던 유목 민족의 정체성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왠지 남아 있는 미진함. 그것은 실크로드 길 위에서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전시장 흰 벽에 쓰여 있는 “실크로드는 문명 교류의 길이다. 그 길을 통해 문명과 문물이 전해지고, 발전하고, 사라져간다.”란 글귀에서 유난히 ‘사라져간다’에 방점이 찍힙니다. 그 사라진 것의 흔적이 우리와 세계 속에도 남아 있지만, 그 오아시스 도시들에 오롯이 남아 거듭 발전하고 있지 못한 현재가 슬프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또한 실크로드 밖에 사는 사람의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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