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동그라미

1919년 1월 21일(음력).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식민지하의 만백성에게 발표
됩니다. 삼삼오오 모인 백성들의 입에서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오게 됩니다.

황제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만백성의 독립의지를 다지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니 그것이 바로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입니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지 꼭 10년이 되는 기미년이었습니다.

시작은 지식인들이었지만 젊은 학생들에 의해 행동에 옮겨지고 한달 후에는
전국으로 번져갑니다. 그런데 1년이 넘도록 진행된 만세운동에서 가장 많이 참여한
계층은 지식인도 학생도 아닌 농민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직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어 혹심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직접
저항운동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농민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졌던 지역이
바로 안성입니다.

비폭력 운동으로 진행되던 3.1만세운동이 무력적인 일제에 의해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자 한 달 후 안성지역의 농민들, 특히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세찬 만세시위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면사무소와 순사주제소, 우편소 등의 식민지배기구였던 곳을 불태우고
일본 상인들을 공격합니다. 순수만세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적극적이고 격렬한 무력저항운동을 한 것입니다.

적극적인 저항시위에 맞선 일제의 탄압도 다른 곳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안성은 황해도 수안군, 평안북도의 의주군과 함께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인정받을
만큼 격렬하게 저항항쟁을 한 지역입니다.
단위 군단위의 연대시위로 발전한 만세운동으로 각 지역에서 대규모시위가 가능했지요.

원곡면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농민들과 함께 양성면의 농민들도 참여를 하면서
수백명의 농민들이 한밤중 산위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자 만세운동은 마치 봉화의
횃불처럼 퍼져 안성 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원곡에서 양성으로 가는 경계에 성은고개가 있습니다.
두 지역의 농민들이 수없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오르내렸던 고개라 하여 만세고개로
불려질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오늘에는 성은고개 대신 만세고개로 명칭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 만세고개 정상에는 안성지역의 수많은 독립운동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기념관이 새워졌습니다. 순국선열의 사당을 가슴에 품고 당당하게 자리 잡은
기념관은 여느 기념관과는 다르게 숙연함이 더해집니다.


안성삼일운동 기념관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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