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에서 펼쳐보는 고구려 역사와 사랑

글: 하늬바람~

 


만종분기점에서 나와 중앙고속도로를 탈 때마다 한적함이 약간의 소외감으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복작대는 서울에선 ‘풍요 속의 빈곤’이라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불빛이 휘황찬란한데, 이곳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기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의지하여 먹을거리를 만들고 우리 도시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지요. 그러나 현실 사회와 정치는 그 신성한 노동을 자주 배반합니다. 그래서 드는 단상...

그런데 1500여 년 전, ‘적성’이라 부르던 단양은 삼국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툴 것 같지 않은 그저 강과 산이 서로를 품은 마을, 그러나 1500여 년 전에는 한강(하류)과 더불어 신라와 고구려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지요.

단양군 영춘면 하리. 남한강과 함께 달려온 길에서 한발 비켜서자 온달산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성 오르는 길에 내려다 본 풍경. 날이 좀 흐려 남한강 멀리 보이는 영월 쪽 태화산 봉우리가 뚜렷하지 않다.

<평강 공주가 사랑한 남자 온달>
온달은 평강공주와의 설화로 유명한 고구려의 장군이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삼국사기》〈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에만 나와 있을 뿐이라 사실 기록은 빈약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온달은 평원왕 때 사람입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느릅나나무 껍질을 벗겨 먹어야 했던, 그러나 늙은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는 마음씨가 밝은 청년이었지요. 그런 그가 한마디로 공주와 혼인하여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해마다 3월 3일이면 열리는 사냥대회에서 훌륭한 사냥솜씨를 보인 것입니다. 게다가 북주(삼국사기엔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이산(肄山)의 들에서 무공까지 세우게 됩니다. 이런 온달에게 평원왕은 대형(大兄)의 벼슬을 주었습니다.

 

중턱에 지은 사모정. 원래 있던 정자는 아니다. 이 자리에 놓았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평강 공주가 어루만지니 비로소 들 수 있었다는 곳.

<온달,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필시 평강 공주가 보통 여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을까요? 아니면 정치적 야심이 있었을까요? 이도 아니면 온달이 설화와 달리 미남이었을지도? 이런 상상이 모두 가능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좀 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이야기합니다.

문자왕 이후 고구려는 최고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기고(551년) 이미 강원도 땅까지 내어준 고구려는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의 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문자왕 때엔 심지어 왕성 앞에서 귀족들이 패싸움을 벌일 정도였다고 하죠. 게다가 북주와 돌궐의 침입 위협까지!

이런 상황을 돌파해야 했던 평원왕에게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시대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요? 기존의 썩어문드러진 귀족이 아닌 참신한 세력! 이때 평원왕에게 발탁되었던 인물들에 을지문덕,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등이 있었고, 아마 온달도 그런 신진 세력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대형(7등급) 이상의 벼슬에 올랐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는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평민이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신분 상승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새롭게 떠오른 별 중 한 사람이었던 온달이 평강과 혼인한 것은 적어도 북주와 싸워 이긴 다음이었을 것입니다.

 

넘어가기 힘든 북문 쪽 성벽. 든든한 요새로 느껴진다.  

<온달은 빼앗긴 한강 북쪽 땅을 되찾으러 내려왔다>
역시《삼국사기》〈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의 뒷부분입니다.
온달은 한강 이북의 땅을 신라에 빼앗긴 것을 억울해 하며 영양왕에게 출전을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영양왕 1년, 590년). 온달은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떠났지만,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의 굳은 결의가 참으로 생생했는지 장사를 지내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죠.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지요.

이런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온달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장차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며, 뒤에서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신라를 눌러 놓기 위해 출전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온달 스스로 말한 대로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면 더이상 때를 늦출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온달이 죽었다고 전하는 또 다른 곳, 아차산성

<온달이 죽은 곳은 온달산성일까?>
온달산성이 자리한 영춘은 옛날에 을아단현으로 불렸고, 백제 땅이었을 때는 ‘아단성’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난 뒤에는 ‘위〔上〕’의 뜻을 지닌 ‘을(乙)’이 붙어 을아단성으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온달이 되찾으러 떠난 죽령 서쪽에 있는 이곳 온달산성이 아단성이라는 주장입니다.

아니다, 서울 구의동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며 온달이 전사한 성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원래 아단성이었던 아차산성은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단(旦)’을 피하기 위하여 ‘차(且)’로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590년 무렵에 고구려가 땅을 되찾기 위하여 죽령 가까이까지 깊숙이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전투를 벌였다면 한강 하류가 현실적이라는 것이지요. 그 밖에 남한강 상류의 온달산성이 을아단성이라면 한강 하류에 아단성이 있지 않겠냐는 추리에 가까운 견해도 있더군요.

그러나 백성들의 인식도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이 지역에 온달에 얽힌 전설이 지명 속에 얼기설기 배어 있다는 것은 이 지역 백성들은 온달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어쩌면 이 땅을 고구려의 땅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백제, 고구려, 신라의 땅으로 뒤바뀌는 와중에 당했을 고통을 뒤로 하고 온달의 설화를 간직한 자체가 애달픕니다.

온달산성의 동문이 보인다. 구불구불한 돌담길 같은 성벽이 아담하고 정답다.

<아, 이것이 테뫼식 산성!>
큰 성을 기대하고 올라왔다면 잠시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네요. 성벽의 길이는 682미터, 하늘 위에서 본다면 말발굽 모양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처럼 느껴져요. 워낙 경사면에 쌓았기 때문에 안에선 성벽 높이가 1~4미터이지만 밖에선 6~7미터 아주 높은 곳은 10미터도 되니까요. 아마도 남진(南進)하는 주력부대가 배치된 산성이 아니었을까? 물론 반대로 신라가 북진하기 위해 쌓은 전초기지일 수도 있고요.

비교적 산성이 작은 건 테뫼식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산 정상부에 머리띠를 두르듯이 성벽을 쌓은 것이지요. 그러니 골짜기를 감싸 안으며 쌓은 남한산성 같은 포곡식 산성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꼭대기까지 돌을 납작하게 다듬어 정교하게 쌓아올렸으니 이 일에 동원되었을 병사들과 백성들의 땀이 이 산성을 버티게 한 것은 아닐는지요.


단양 적성산성. 신라 진흥왕때 적성을 차지하고 이 안에 적성비를 세웠다. 온달산성과 축조 방식이 같다. 신라 북진의 기지 

<온달이 쌓았나? 신라의 성인가?>
설화에 따르면 온달이 쌓았다고 하지만 성을 쌓은 방식은 신라 성에 가깝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산성인 경주 남산성, 보은 삼년산성, 그리고 단양 적성산성과 모습뿐 아니라 방식도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고구려 성은 비교적 큰 쐐기돌과 북돌을 맞춰 안쪽으로 조금씩 들여쌓는 퇴물림 방식입니다. 그러나 여기 온달산성은 납작한 점판암을 우물정자로 차곡차곡 쌓는 방식이지요. 안과 밖 그리고 안에까지 돌로 쌓았는데, 북문 쪽에 있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도 삼년산성의 배수구와 같다고 하네요.

처음 보는 문인 동문. 이렇게 생긴 모양의 문을 현문이라 한다

배수구. 북쪽이 낮으니 이쪽으로 배수구를 놨겠지. 아직도 돌틈에 피어 있는 노란 씀바귀 꽃이 이쁘다.  

산성을 돌아볼 때는 성의 독특한 방어 또는 공격 시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북문은 개거식으로 보통의 성문과 다를 바 없지요. 그런데 문 밖은 공격하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가파릅니다. 동문과 남문은 처음 보는 현문입니다. 문은 지상에서 성벽 높이의 절반까지 돌을 쌓았기 때문에 위에서 사다리나 문을 내려주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성이든 가게 되면 성벽 길을 걸어보는데, 성가퀴도 없는 온달산성의 성벽은 내려다보면 아찔한 절벽이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북문 너머는 경사가 절벽 수준. 여기선 산과 하늘이 먼듯 가깝다.

<온달산성에서 이야기의 생명력을 생각한다>
산성은 산을 닮았습니다. 굽이굽이 흐르는 능선처럼 성벽은 부드럽게 굽이치네요. 담쟁이덩굴도 단풍이 들어갑니다. 사람 손길이 덜 미친 성안에 여름 내 웃자란 잡풀도 무성합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올라와 산성에 서니, 그야말로 하늘과 마주한 정상입니다. 영월 쪽의 태화산 줄기와 남쪽의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온달산성을 품으니 그야말로 오지가 따로 없습니다.

이런 곳에 고구려의 역사가 발길 닿는 곳마다 새겨져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1500여 년 동안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온달과 평강의 사랑이 전해진 것을 보며, 이야기의 생명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온달과 평강의 사랑은 어찌어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윤색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그 시대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온달은 고구려에 드리운 위기를 진취적으로 해결하려던 용감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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