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 침략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강화산성

글: 하늬바람~ 

간혹 운명이라 해도 거스를 수 있다는 오기가 발동하기도 하지만 참, 천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겠지만 강화가 그런 곳이 아닐까요?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면서, 어쩌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껴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섬.
사람으로 치면 타고난 천성이 순둥이이지요.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괴롭힘을 받다 보면 순둥이 가슴에도 날선 오기가 서리는 법. 강화 너른 들과 바다에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다가도 해풍이 매섭게 불어대는 걸 볼 때면 나는, 강화의 오기 또는 결기를 느끼게 됩니다.


강화 고인돌 역사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처음 만난 문은 강화산성의 서문인 첨화루였다.

<눈물로 쌓고 눈물을 뿌리며 허물었던 성, 강화산성>
고려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고종 19년, 1232년) 송악산이라 이름 붙인 북산 밑에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았습니다. 그것도 내, 중, 외 3중으로 말이지요. 그때 쌓은 성 중 내성이 지금의 강화산성입니다. 흙성으로 쌓았다고는 하지만, 13년에 걸쳐서 쌓았다니, 그동안 강화 백성뿐 아니라 성 쌓기에 동원된 백성들의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토록 백성들의 피땀으로 쌓은 성이건만 몽골과의 강화조건으로 궁궐과 산성을 헐게 되지요. 그 고통이 성벽을 쌓는 것보다 더 컸다고 하지요. 《고려사》에서는 당시 성곽을 허물던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성을 쌓지 말지하며 통탄해 하였다고 전합니다. 몽골군은 성을 허무는 것도 모자라 곡식과 민가를 불태워 강화 백성들의 어려움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리장성만 피의 장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외세의 침략 때마다 번번이 제 몸을 던져 맞서는 것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흰 눈처럼 순결한 민(民)이란 말일까요?


강도남문이란 현판을 단 남문.(사진: 문화재청)  

 <강화산성의 역사>
고려 왕조의 멸망과 함께 흔적을 찾기 어려웠던 산성이 다시 옛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선이 서고 나서였습니다. 조선 초에 흙성(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게 되었지요.

그 뒤의 역사를 간략히 적으면 이렇습니다.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당시 일부가 파손이 되어 효종 3년(1652)에 보수.
숙종 3년(1677) 유수 허질이 앞은 돌, 뒤는 흙으로 개축 확장.
숙종 35년(1709) 유수 박권이 동․서․북쪽의 일부를 지음.
숙종 37년(1711)에 유수 민진원이 동남쪽의 일부를 최종 완성하여 오늘에 이름.
성 둘레는 7,122미터 4대문, 4소문, 수문이 2곳, 4개의 성문 장청에 치첩이 1813개소나 됩니다. 하지만 현재 그 문과 시설들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요.


문마다 이름이 있는데,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동대문이니 남대문이니 하고 부르면 안 되듯이 ‘첨화루’란 이름을 바로 불러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두 사람이 나누고 있다.

<아름다운 문루를 가진 서문, 첨화루>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인 첨화루(瞻華樓).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루를 본다? 1711년 강화 유수였던 민진원이 건립한 문입니다. 지금 모습은 1966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상태. 중수기에 따르면 재목은 안변에서 들여오고, 하점면에서 기와를 구워서 3개월에 걸쳐 새로 꾸몄다고 합니다. 첨화루를 지은 감격한 마음에 직접 현판 글씨도 썼다지요.

첨화루 성벽을 보면 돌의 아름다움은 시간과 공정과 비례한다는 것을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기계로 반듯하게 자른 성돌과 쐐기를 박아 자른 돌을 그렝이질을 하여 짜 맞춘 것과의 현격한 차이. 사람의 손길이 그만큼 무섭습니다.

서문을 지나 마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아래를 지날 수 없는 것과 다르지요? 그러나 장작 달구지가 한 번에 스무 대씩이나 드나들었다는 시절과는 완연히 다른 풍경입니다. 48번 국도가 생기기 전엔 식당도 많았고 가장 붐비던 길이라던데……. 지금은 남문에서 남산을 넘어 서문으로 이어지는 산성 길을 48번 국도가 토막을 내는 바람에 한쪽 성벽이 뚝 끊겼습니다.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던 연무당이 있던 곳이다.

<서문 옆 고적한 연무당 옛터>
첨화루 옆에 연무당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적비가 서 있습니다.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일본과 여기서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른바 함포 외교. 옆에는 물길도 쇠락해진 동락천이 무심히 흐릅니다.

본래 강화 진무영의 최고 사령관이 사열을 하던 사열대인 열무당은 강화 읍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훈련을 하던 교장 주위로 민가가 늘어나자 서문 쪽에 훈련장(외교장)을 짓고 새로 연무당을 세웠습니다. 고종 7년(1870)의 일입니다.

운요호 사건 후 일본과의 회담은 지금 강화읍 사무소가 있는 중영에서 시작되었지요. 일본군은 중영 옆 열무당에 개틀령 기관총 4정을 가져다 놓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회담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종 조인식을 연무당에서 했던 것. 남의 나라 군사 훈련 장소에서 조약을 체결한 이유, 분명하지요. 너희 나라 군대쯤이야 우습다 이거 아닐까요?

옆으로 차들이 지나가는데도 고적하기만 한 옛터에 서니, 조선의 회담 대표였던 신헌의 어깨에 얹힌 무게까지야 못 느껴도, 그날의 황망했던 순간이 내게도 조금 전해지는 듯하였습니다.


선원 김상용 순절비. 원래는 옛 남문 터에 세워졌던 것인데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사업 때 지금의 관청리로 옮겨졌다.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 26년(1700)에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건립한 것이다.

<분신으로 호란의 치욕을 불사르다, 김상용 순절비>
남문은 반드시 지켜야 할 문입니다. 몽골군에게도 열지 않았던 그 남문이 병자호란 때는 김경징에 의해 열리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의 공신 김유가 한성판윤으로 있던 자신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수비대장으로 보냈습니다. 대를 이어 인조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김유는 바랐을까요? 그러나 김경징은 연일 술판을 벌이며 사태의 화급함을 잊었지요. 결국 강화는 함락되고 불쌍한 강화의 백성은 온몸을 던져 맞서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다에 목숨을 던져야 했습니다. 김경징은 응당 탄핵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대로 남문루에서 청의 침입에 온몸을 불살라 항거한 이가 있었습니다. 선원 김상용. 그는 김상헌의 형입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표 인물로 알려져 있지요.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서인-노론의 맥을 있는 가문.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걸친 김상용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시종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문루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순절하였지요.


관청리 길 강화초등학교 앞 문방구. 고려 궁궐이 있었을 적엔 아마 궁궐 부속 건물이 있었을 자리인데, 지금은 문방구.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이 아이들의 발길을 잡는 자잘한 물건이 가득하다. 

4월이면 북문 일대는 벚꽃이 만발한다.

<송악이라 불린 북산에는 북문 진송루가 서있다>
관청리 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고려 궁지입니다. 오늘은 고려 궁지를 그냥 지나 왼편으로 난 북문 길을 올라갔습니다. 시멘트로 잘 포장된 길 양쪽에 벚나무가 늘어섰네요. 지금쯤이면 벚꽃이 피기 시작했을까요? 춘분이 지났는데도 여태껏 꽃눈은 부풀어 오르지 않고 하얀 햇살만 머금고 있었습니다.

벚나무 길이 끝나는 곳에 북문 진송루가 우뚝 서 있네요.‘진압할 진(鎭)’. 소나무를 진압한다는 게 무슨 뜻? 일대에 우거졌던 울창한 송림마저 누를 듯 위풍당당한 기세의 문루를 세웠다는 것일까요?
처음 산성을 쌓았을 때는 문루가 없는 암문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문루는 정조 7년(1783)에 지어 올렸습니다. 그나마 지금의 진송루는 2백여 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고 박 정권 때 복원한 것이지요. 워낙 암문이었던 때문인지 홍예문이 아니고 장대석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암문의 모습을 띠고 있더군요.


북문의 이름은 진송루이다.

<화남 고재형, 북장대를 노래하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북장대 터로 추정하는 곳에 꽂힌 팻말. 과연 북장대가 있었을까, 스치는 의문. 고려 궁지 뒤편 꼭대기쯤입니다. 강화 답사의 선구자 화남(華南) 고재형(1846~1916)이 쓴 시로 이곳이 북장대 터임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높다란 석축 위에 북장대가 있는데
  
산 가득 숲 우거졌고 산들바람 불어오네.
  
누가 먼저 차지하여 무예 위엄 보이는가.
  
분명한 군령 후엔 몇 잔 술이 있었겠지.

고종도 이곳에 올라 손에 잡힐 듯 지척에 있는 개경을 그리워했을까요? 망국의 한 또한 손에 잡힐 듯하군요.


북장대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풍경

<강화가 한강의 관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다>
잠깐,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취합니다. 동북쪽에 연미정이 보이고, 염하도 보입니다. 한강으로 이어지는 물길. 아, 강화가 바로 한강의 관문이었지. 그리고 코앞에 북녘 땅이 보이고…….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내려온 분들이 많이 산다는 게 이해되었습니다. 해주에서 내려온 돌아가신 아버지도 강화에 오는 걸 좋아하셨지요.

아래로 넓게 펼쳐진 들녘, 아마 간척지가 아닐까? 지도에서 짚어보니 송해면 일대일 것 같은데, 반듯반듯한 저 논에서 기름진 강화 쌀이 나오는 거겠지요. 쌀쌀하면서 달달한 바람. 그리고 호쾌함.


북쪽 성곽 길. 동문으로 가는 성곽은 성가퀴가 사라진 채 흙길이 울퉁불퉁하였다.

<강화산성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북문 밖에 오읍 약수와 벚꽃 길은 다음 기행에 남겨두고 내려왔습니다. 아니, 강화산성의 아주 일부분만 돌아본 기행이었지요. 앞으로 그 속내를 알 날이 금방 올까요.

강화산성은 고려 왕조의 40여 년간의 치욕만 쌓인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 피란 온 인조를 보았고, 외규장각까지 들어와 분탕질을 한 병인양요의 프랑스군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도 지켜보았지요.
성돌에 새겨진 백성의 분노와 오기와 결기를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고 강화의 매서운 봄바람이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맺힌 눈물은 알아도 백성들 가슴에 흐르는 눈물은 보지 못하는 위정자들에게 쉽게 연민을 허락해선 안 된다, 강화의 바람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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