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진남루에서 서문까지
                    - 돌 하나에도 사연이 있어요

글/하늬바람~



     성의 남문인 진남루의 홍예가 멋집니다!


바다가 봄바람을 실어왔을까요?
아름다운 바다가 가까운 해미(海美) 가는 날,
전날까지 버티던 추위가 봄눈 녹듯 풀려 우리들의 발걸음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아래쪽 넓은 돌은 시원하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돌들은 균형미가 느껴집니다. 쭉 뻗은 시원함과 돌의 부드러움! 칸딘스키의 추상화만큼이나 멋진, 그러면서도 소박한 해미읍성입니다.


      해미읍성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는 고고학자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들의 노략질은 나날이 심해졌습니다. 이곳 충청남도 해안까지 올라오는 것도 예사라, 태종은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해미로 옮겼답니다. 병마절도사영은 그 뒤 효종 때 청주로 옮겨갔다고 하니 조선 전기 200여 년 동안 해미는 서해안을 지키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병영이 있으니 읍성도 쌓아야겠지요? 성종 22년에 성벽을 완공했다고 해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1578년에 한 10개월을 근무했어요.



청주, 공주, 이광이라고 새겨져 있네요


옛날에 성을 쌓을 때는 백성들이 나와 부역을 했어요. 진남문 옆에 어느 고장의 누가 나와서 일을 했는지 새겨 놓았어요. 아마 나중에 수리할 게 생기면 그 마을에 책임을 물을까요? 문 왼쪽엔 ‘청주’, 오른쪽엔 ‘공주’ 그리고 ‘이광’이란 이름이 새겨 있는 걸로 보아 멀리 청주에서 여기까지 와서 일을 했나 봐요.


     서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성벽 길을 걸었어요. 눈이 녹아 길은 질척였지만 치성도 보고 방위에 따라 깃발이 바뀌는 것도 보고 좋았어요. 서문 밖에는 ‘순교현양비’가 있어요. 저 비석은 옆에 돌다리에서 죽은 가톨릭교도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세웠지요.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옆에 순교현양비를 세웠어요

서산, 당진 일대는 일찍부터 외국의 문물이 전파되던 곳이라 천주교 신도 수가 다른 지역보다 많았답니다.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외세의 침입(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은 그들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켰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도 이어졌지요. 해미에도 피바람이 일었습니다. 미처 성안에서 사형시키지 못한 사람들을 여기 서문 앞 돌다리에서 자래기질을 해 죽이기도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예수”를 찬양했다는 그들의 순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때로 역사는 매우 무거운 숙제를 주는군요.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