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객사에서 내아까지 - 관아에도 이야기가 있어요
글/하늬바람~
객사, 가운데 파랑색 문이 달린 곳이 정청이에요
객사는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과 귀빈들 숙소만은 아니었습니다. 건물 정청에 ‘궐’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셔두고 삭망(매달 초하루와 보름을 가리키는 말)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모여서 멀리 계신 임금에게 예를 올렸던 곳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얘기가 수없이 자주 나와 “참 절 한번 자주도 한다.” 생각했었는데, 정말 요즘과는 다른 유교 사회의 질서를 알 수 있어요.
멀어서 문 이름이 잘 안 보이네요 읍성의 외삼문 <호서좌영>
‘호서좌영’은 문 이름입니다. 이 문은 해미읍성 관아로 가는 외삼문이에요. 오른쪽 문은 고을 양반들이 출입을 하고요, 왼쪽 문은 백성들이 다녀요. 가운데 문은? 그렇죠, 이곳 현감 겸 진영장이 드나들던 문이었겠지요. 문지기가 철저히 지켰기에 장사꾼, 스님, 무당은 특히 얼씬하기 힘들었답니다. 하지만, 우리 용인 드림 팀이야 거칠 것 없이 통과하겠지요?
열린 문 안에 집무를 보는 수령의 모형이 있어요
야, 여기가 동헌이로구나! 반갑게 뛰어가니 안엔 현감이 진영 안의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있어요. 동헌은 수령의 집무실이에요. 호서좌영이 설치된 것은 효종 임금 때(2년, 1651년)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해미 현감이 병영 장을 겸해서 일을 했겠지요. 인근 12개 마을의 병무와 포도대장의 일도 맡아서 했다는군요.
머리엔 노란 벙거지 모자를 쓰고 까만 가죽신을 신고 융복을 입은 사또는 동헌 마루에 앉아 고을의 분쟁이나 억울한 일도 해결하였어요. 말하자면 조선 시대엔 수령이 사법권까지 가졌던 거겠지요? 형방은 미리 죄인을 조사하여 ‘수도안’을 올려요. 억울한 백성들은 문서(질지)나 말(발괄)로 사또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지요. 그럼, 사또는 사정을 잘 헤아려 벌을 주기도 하고 죄가 없음을 밝혀 주기도 합니다.
남쪽이나 서해안 지방에서는 이렇게 주로 일자형 집을 지어요
사또의 살림집입니다. 집은 전형적인 충남 지방의 일자형 집이에요. 집 자체는 기와집이지만 매우 조촐하여 놀라웠어요. 맞은편에 3칸짜리 맞배지붕의 집이 있는데 곳간 문처럼 생긴 곳이 두 간이에요. 뭘까? 궁금한 것 못 참아!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흙바닥이 아닌 마루가 깔렸네! 필시 책이나 귀중품을 보관하던 곳 아니면 현감의 사랑방 내지 서재가 아니었을까요?
북쪽은 소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산을 끼고 성을 쌓았고, 망루가 있어요
동헌 동쪽으로 난 문으로 나가면 가파른 계단이!
아, 수자기가 펄럭이네요. 이곳은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 수자기는 진중(陣中)이나 영문(營門) 뜰에 세워 놓는 대장의 기예요. 노란색 바탕에 ‘수(帥)’ 자가 새겨져 있어요. 진영 안에서 훈련할 때 썼다는데, 이곳 청허루(망루)에서 조련을 하였나 봐요. 망루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북쪽 성곽까지 가면 복원 중인 해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인왕산 호랑이 팀은 “가위바위보” 재미나게 계단을 올라갑니다.
우리 친구들이 씩씩하게 올라가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해미읍지>에 따르면 성 둘레엔 탱자나무를 심었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해자를 팠다고 하거든요.
복원 중인 해자예요. 복원이 끝나 여기에 물이 흐르면 참 멋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