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령을 넘어 북한산 자락에서 총명한 정의 공주를 만났네!

글: 하늬바람~ 


우이령은 북한산을 통과하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 우이동을 잇는 옛고개길이다.

<소걸음으로 넘는 고개, 우이령길>
맨발로 걸어도 좋은 숲길입니다. 여유 있는 소걸음으로 소귀고개(牛耳嶺)로 올라가는 길은 온몸의 세포를 행복하게 충전해 줍니다. 어쩌면, 이 아름다운 길을 걸어서가 아니라 ‘쌩’하니 차로 달릴 수도 있었다니, 참 아찔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린 계곡물 소리가 발끝에 걸리고, 한낮의 햇빛도 고개를 살짝 돌리는 길. 발걸음마다 박자가 저절로 맞추어지는 길인데…….

1994년 서울시와 양주시가 북한산과 도봉산을 이어줄 뿐 아니라 양주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이 고갯길에 2차선 도로를 포장하려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쉽게 서울을 오가자는 것이었지요. 그때 우이령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 그 무지막지한 계획을 저지하였기에 지금 우리는 두발로 이 길을 지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가을엔 이 꽃들이 에메랄드 보석으로 바뀐다. 누리장나무의 꿀을 제비나비는 무척 좋아한다. 

<제비나비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길>
자연 그대로의 고갯길을 지키려는 노력의 결과, 우이령길은 하루에 1,000명 이내의 사람들에게만 개방하는 자연탐방로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2009년의 일이니까 우이령길이 닫힌 지 4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우이령은 본래 경기도 양주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가장 짧은 고갯길입니다. 오래 전부터 마차로 생필품과 곡식을 운반하던 옛길이었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같은 옛이야기의 배경이 될 만한 험한 고갯길은 아닙니다. 그래도 모르죠? 옛날엔 호랑이 같은 맹수가 나타나던 길이었는지도.

출발 지점인 양주시 장흥 교현 들머리는 소박한 시골 동네 같았습니다. 숲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비나비가 반겨줍니다. 큼직한 날개를 우아하게 펼치며 길 안내를 해 줍니다. 역시나 산길 곳곳에 누리장나무가 붉은 듯 흰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있습니다.

신나무는 큰 키와 잎으로 햇빛을 가려주고, 사방사업으로 심은 물오리나무가 오리나무를 대신하여 계곡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이동 탐방센터 가까이까지 함께한 제비나비. 말없이 걸어준 어여쁜 동무입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탄성을 지르게 되는 오봉의 멋진 모습 

<멀리 보이는 오봉은 마치 나침반 같아>
밖에서 보는 북한산은 다소 위압적인데 안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봉우리들은 그저 어머니같이 푸근합니다. 물결치듯 흐르는 능선 사이에 우뚝 솟은 오봉이 마치 길표지판 같아요. 길을 잃을 염려도 별반 없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 오봉을 나침반 삼아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만큼 바라보는 눈맛이 시원합니다.

산사람들은 툭 치면 뚜르르 떨어질 것 같은 오봉바위를 올라갑니다. 암벽 등반의 묘미겠지요. 저렇듯 잘생긴 바위에 전설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전설이 그렇듯이 이야기는 상투적입니다. 고을 원님에게 예쁜 딸이 있어 딸과 혼인하고 싶어 하는 총각들이 많았지요. 사또는 돌을 던져 봉우리 위에 얹는 자에게 딸을 주겠노라 약조하였습니다. 시합에 참가한 다섯 총각 중 한 사람을 빼고 성공. 원님은 약속을 지켰을까요? 산봉우리에 사뿐 공깃돌을 얹은 것 같은 모습이 그저 신기합니다.


우이령 정상에 세워진 대전차 장애물.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는 군시설이  북한산에도 있다.  

<소귀고개에 앉은 분단과 냉전의 상처>
한국전쟁 당시 이 길은 피난길이었습니다. 휴전 후에는 군사작전 도로로 이용되었지요.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병대가 작전도로로 닦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36공병단 도로로 1964~1965년에 건설되었다는 기념비가 도로 중간에 서 있습니다. 그 중 우이령(소귀고개)에 세워진 대전차 장애물은 탱크를 막기 위한 시설입니다. 그나마 콘크리트에 기대어 생명을 퍼트리고 있는 푸른 이끼가 군사 시설의 차가운 기운을 누그러트려 줍니다.

우이령길이 지난 40년 간 민간인 출입금지가 되었던 것은 1968년 1 ․ 21사태 때문이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을 암살하라는 특명을 받은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무장간첩 31명이 침투한 사건.
그들 31명은 1월 18일 자정 군사분계선을 넘어, 임진강과 우이령길을 통과 청와대 뒤까지 바짝 들이닥쳤습니다. 세검정 고개에 있던 자하문 파출소까지 잠입한 시각은 20일 밤 10시경. 시내버스에 수류탄이 터지고 이어진 무차별 난사……. “종로서 최규식 총경이 순직하였다더라. 군경이 일대를 쥐 잡듯 뒤져서 서울 사람들은 바깥에도 나가기 힘들다더라.” 어른들 입에서 퍼지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공포심에 사로잡히던 일이 떠오릅니다.

군경합동수색팀은 그해 1월 31일까지 수도권 일대에서 소탕작전을 벌였지만 2명은 끝내 잡지 못하고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28명 사살에 생포된 간첩은 김신조.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영화 ‘실미도’로 알려진 북침투 부대(684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그저 걷기에 좋은 이 길에도 역사의 상흔은 딱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앳된 전투 경찰 청년들이 체감하기에는 먼 역사처럼 느껴지는 딱딱해진 상처. 그러나 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분단의 상처입니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제1호. 은행나무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830년 

<번다한 우이동 계곡을 지나 왕실 묘역길에 접어드니…>
6.7km의 우이령길은 우이동 입구에서 끝이 났습니다. 실상 숲길은 5km 남짓밖에 안 되는군요. 우이동 탐방센터부터는 유원지. 여름 무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환호성이 좁은 계곡을 채우고, 길 양옆으로 즐비한 식당을 찾아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옵니다.

우이령 지키기 운동이 없었다면, 우이동 계곡의 위락시설은 방금 지나온 길로 더 높이 올라갔을 테지요. 그나마 1.5km의 시멘트 길에서 인간의 이기심이 끝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불과 30분 전에 누렸던 숲의 평화를 되새기며 도봉산 지구 왕실 묘역길로 길을 잡았습니다. 동네 뒷산 분위기. 잔잔한 새소리 귓가에 속살대는 길 끝에 다시 작은 마을, 방학동. 그리고 뜨거운 햇살이 이리저리 뒹구는 좁은 골목길 끝에 우람한 은행나무가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830살 먹은 은행나무! 이쯤 되면 당산나무 수준이 아니라 우주목에 가깝다 해야 할까요?

그럼, 바로 맞은편에 묻혀 있는 연산군은 이 은행나무와 더불어 500년이란 시간을 보냈겠군요. 연산에게 왠지 위로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과 부인 신씨 묘.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으로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부탁으로 이곳에 이장할 수 있었다고.

<곡장 밖 망주석에서 연산군의 씁쓸한 일생을 보네>
연산군 묘에 올라 망주석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느 왕릉과 망주석이 어떻게 다를까? 과연 연산군 묘의 망주석은 곡장이 끝나는 선 밖에 있었습니다. 곡장은 능침의 좋은 기운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두른 담장. 하지만 앞까지 막을 수 없기에 생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망주석을 세웠다는 게 가장 유력한 설(說)입니다. 풍수의 수구(水口)막이인 셈. 해서 망주석의 위치는 곡장 담이 끝나는 지점 안쪽에 세워둡니다.

그런데 연산군 묘의 망주석은 곡장 밖에 두었지요. 이미 죽은 연산군이지만 저승에서도 절대 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겠지요.‘연산군의 폭정’이라는 반정의 명분이 확실함에도 중종은 빼앗은 왕위라 절대 안심할 수 없었나 봅니다.

게다가 소박하다 못해 단출하였습니다. 보통 연주(기둥)에 세호를 돋을새김하고 대석도 2단으로 연꽃과 모란을 조각하는 등 화려하게 꾸미는데 단출한 대석 위에 연주조차 평범합니다. 게다가 세호도 없습니다. 있어야 할 게 없다는 건, 왕의 지위는커녕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겠지요. 참 씁쓸한 인생입니다.‘군(君)’의 예를 갖추어 이장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요? 그나마 발치에 묻힌 딸 휘순 공주와 사위 능양위 구문경의 봉양을 받는 것도 위로가 되었을까요?

 

세종대왕의 둘째딸 정의 공주 묘. 남편 양효공 안맹담과의 합장묘. 왼쪽(서쪽)이 공주 묘. 죽은 자에게는 서쪽이 더 높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총명한 정의 공주>
이제 오늘 답사의 종점에 도착했습니다. 정의(貞懿) 공주! 세종의 둘째 딸입니다. ‘곧고 아름답게’란 뜻의 이름을 지닌 총명했던 공주였습니다. 조선의 공주라 하면 사실 관심 밖의 인물들. 정치 활동이 허락된 것도 아니고, 그저 죽을 때까지 ‘공주마마’로 받들어지는 어쩌면 인형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공주도 있었으니, 바로 정의 공주가 아닐까요? 그녀는 아버지의 애민 정신에 깊이 공감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조차 최근에야 조명 받는 사실이긴 합니다만…….

세종 10년(1428), 정의 공주는 죽성군(후에 연창위, 양효공으로 불림) 안맹담과 혼인하였습니다. 공주가 훈민정음에 창제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는 맹담의 집안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께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셨다. 하지만 모두 풀어내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정인지가 짓고 아들 안빈세가 쓴 신도비는 이수와 귀부와 비신을 두루 갖춘 비로 조선 초기의 비가 이렇게 전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사진:문화재청)

<정의 공주가 풀었다는 변음과 토착은 무엇일까?>
도대체 변음(變音)은 무엇이고, 토착음(吐着音)은 무엇일까요? 1994년 연세대 이가원 교수가 이 글을 처음 세상에 소개하면서 '변음(變音)'은 '말로 할 때 변하는 음'을 뜻하고, '토착(吐着)'은 '한문 구절 아래에 토를 다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변음을 예를 들면 '받아쓰기'를 말로 하면 '바다쓰기(변음)'가 되는데 이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놓고 세종이 큰 고심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한소진의 소설 《정의 공주》에서는, 정의공주의 입을 빌어 변음은 말하자면 사투리 말을 표준말로 변환하여 한 가지로 쓰게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됐슈’라는 충청도 말은 ‘됐습니다’로 표기하는 것이지요. 사실 말이란 게 풍토에 따라 달라져 사는 곳에 따라 같은 말도 달리 표현되잖아요?
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자는 표기에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까지 깊이 고민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토착음은? ‘吐’는 뱉는다는 뜻. ‘토’는 한마디로 중국 발음이 우리와 다르니 우리 소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天’을 중국처럼 ‘텬’이라 말하지 말고 ‘천’으로 소리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着)’은 붙인다는 뜻으로 우리말의 조사에 대한 그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자는 조사와 어미를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조사가 매우 발달한 언어로 조사를 어떻게 표기해야 좋은지 그 사용법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 공주는 새로 만든 글자를 가지고 문장 쓰는 법을 풀었다는 얘기가 되네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실제의 언어생활, 특히 백성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없고서야 불가능했겠지요.

 

1911년 계연수가 쓴 조선 상고사인《환단고기》는 사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려 말 이암이 썼다는《단군세기》또한 책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환단고기》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단군세기》에 고대문자인 이 가림토 문자(정음 38자)가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한글 창제 이전에도 우리 문자가 있었을까?>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정의 공주가 그 이상의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한자로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우리는 우리의 말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그 말을 문자로 표현할 때는 한자를 빌려서 써 왔지만, 어쩌면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가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궁금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단군세기》에 전해오는 가림토 문자가 훈민정음 창제의 바탕이 되었을 거라고 여깁니다. 경북 경산의 한 바위에도 가림토 문자로 추정하는 문자가 석각되어 있습니다만, 이런 옛 문자(정음 38자)가 소리를 잃어버린 채 무거운 세월을 보내 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백성들은 노래로 문자의 소리를 기억했고, 세종이 드디어 그 문자 중 28자를 가려 문자의 소리를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말을 그대로 반영한 문자, 훈민정음이 탄생한 바, 언어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던 공주 또한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림토 문자와 한글의 연관성은 아직 연구 불모지. 세종과 공주가 기역㈀, 니은㈁, 디귿㈂ 같은 문자와 소리를 정말 최초로 생각해 낸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북한산 우이령길의 여운이 정의공주묘까지 이어졌다.  

<세상에 부러운 아버지와 딸, 세종도 딸 바보>
세종은 작은딸 정의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정의 공주 묘 안내판에는 심지어 한강의 저자도와 아버지 태종이 아끼던 정자인 낙천정을 정의 공주에게 주었다고 하네요. 안맹담은 초서를 잘 썼고 음악과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니 아마 예인 기질이 있었던 듯. 술도 잘 마셔 세종이 늘 걱정하였고, 맹담의 친구들을 불러다 놓고 술을 마시지 않도록 꾸짖었다니, 정의 공주를 향한 딸 바보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정의 공주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어 진정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뉴스거리를 몰고 다니는 문제적 인물은 아닙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반짝이는 별처럼 탐구심에 불탔던 사람이겠지요. 그 열정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온 백성의 눈을 밝게 틔워 주고, 백성의 마음을 쉬운 문자를 가지고 하나로 묶어세우려 했던 여성이었지요. 아마 정의는 남편의 울타리쯤은 훌쩍 뛰어넘는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북한산 우이령 길 끝자락 방학동에 정의 공주가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여성이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다만, 길가에 면한 묘역이 번다해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북한산 둘레길 홈페이지에서 지도를 캡쳐.지도를 보면 우이령길이 짐작되리라. 한번쯤 그 길끝에 잠들어 있는 연산과 정의공주를 만나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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