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 사회과 6학년 1학기 36p

 

 

위화도에서의 선택


참세상
 

 

고려말 이성계의 활약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첫 번째 왕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전쟁터에서 외적과 싸운 용맹한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용감한 군인인 이성계만큼 우리 역사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은 거의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조차 이성계 장군의 승리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이죠.

이러한 이성계의 무패신화는 ‘위화도 회군’이란 사건 때문에 한순간에 빛을 잃습니다. 위화도는 압록강 하류 지역의 가운데 위치한 섬이에요. 고려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죠. 고려 말. 이성계는 중국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수도인 개성으로 쳐들어가 충신들을 죽이고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죠. 어찌되었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이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어요.

그렇다면, 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야만 했을까요? 권력을 잡기위한 계획된 음모였을까요? 아니면 고려왕의 무리한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지금부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린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위화도의 위치


1388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최영 장군이 고려의 최고 관직인 재상이 되었어요. 당시 중국은 원나라의 몽골족을 몰아낸 명나라가 고려의 북쪽 땅을 넘보기 시작했어요.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북쪽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게
됩니다.

명나라의 협박에 고려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났어요. 그래서 당장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이성계는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한 도
이성계의 집안은 당시 원나라를 대신하여 지금의 함흥지방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항복을 했습니다, 곧이어 고려의 장군이 된 이성계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적들을 물리쳤답니다. 그리고 공을 많이 세우면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죠.

최영 장군

박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쟁을 피하고 외교로 해결해보자고 최영에게 말했습니다.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을 무시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388년 5월,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군의 대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총대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왕과 함께 평양에 머물면서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요동을 공격하도록 명령했죠. 고려군이 위화도에 이르렀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진격을 멈춘 채, 왕에게 전쟁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글을 보냅니다. 그러나 평양에 전쟁을 지휘하던 왕과 최영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어요.

위화도 회군로

왕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이성계는 군대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수도 개성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최영의 군대와 싸움을 벌입니다. 이성계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사로잡고 왕(우왕)을 쫓아냈습니다. 그후 왕의 어린 아들(창왕)을 새로운 왕에 오르게 하여 자신은 고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과연 이성계의 주장대로 무리한 전쟁 때문에 군대를 돌렸을까요? 이것은 위화도 회군의 평가와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어요. 첫 번째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비록 명나라가 큰 나라였지만, 당시는 나라를 세운지 20년 밖에 되지 않아서 요동을 확실하게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죠. 당시 요동 공격은 무리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무모함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죠. 이성계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교 공부를 한 사람이 많았어요. 이들은 고려 사회를 유교적 이상향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들에게 중국은 유교의 종주국이었고 고려가 따라가야 하는 나라였답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성계는 중국과의 전쟁은 새로운 유교적 국가를 건설하는데 걸림돌이라 생각한 것이죠.

다음으로 이성계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농사철에 사람들이 군인으로 동원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어요. 세 번째로는 일본 해적의 침입이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성계 자신이 해적을 소탕했기에 그리 큰 문제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비가 많이 내려 병사들의 전염병을 걱정을 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랜 전투 경험을 가진 이성계는 이보다 더욱 힘든 상황에서 전투를 지휘한 적이 있었어요. 전쟁 도중에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죠.

반대 주장들 중에서 실질적인 명분은 지닌 주장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큰 나라에 복종하자는 것이었으나, 이성계는 나름대로 계획을 갖고 있었어요. 우선 권력 장악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명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죠.

태조 어진

그렇다면 위화도 회군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요. 사실 고려 말기는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권력가들의 횡포에 민중들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회 전반의 개혁이 필요했어요.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흥사대부들이나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장들이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안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외세와의 전쟁이나 영토 확장보다는 국가 혁명을 더욱 중시한 신진 세력들의 의지가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한국의 역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그렇기에 이성계의 위화도에서의 선택을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혹은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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