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에 새겨진 사부곡(思父曲)

글/하늬바람~


3월에 때 아닌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더니 눈발에 앞서 봄비가 내렸습니다.
융릉 가는 솔숲 솔빛이 한층 짙푸르러 마음마저 씻기는 듯합니다.

영조 38년 윤5월 13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뙤약볕 아래 놓인 뒤주에서 죽어간 사도 세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무거운데, 솔숲이 또 늘 무거운 마음을 한 자락 덜어주고 씻어줍니다.


△곡장 뒤에서 내려다본 융릉  

융릉은 혜경궁 홍씨 헌경 왕후와 함께 묻힌 합장릉입니다.
마침 융릉 능침에 오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어
곡장 뒤에서 내려다보았습니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의 자리라는데
그 이치는 잘 모르겠고, 세상이 이곳을 중심으로 안기는 듯 포근하여
조선 몇 손가락에 꼽히는 명당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정조 실록>에 따르면 ‘이곳은 효종 때에 표시하여 둔 곳인데, 지금 원침이 되었으니,
실로 하늘이 준 것’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사도 세자가 선대 왕 중에서도 고조할아버지인 효종의 무인 기질을 유달리 사모하였다 하니 이것도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또 사도 세자가 죽기 이태 전 온양 행궁으로 가던 길에 화산에 올라 참으로 좋은 곳이라고 흡족해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이 또한 자신이 묻힐 것을 예견한 것일까요?

 

      △모란과 연꽃이 아름답게 새겨진 병풍석, 그리고 와첨석

       △연꽃봉오리를 연잎이 감싸줍니다.

재위 기간 내내 해마다 현륭원에 원행을 와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던 절절한 심정으로 정조는 아버지 원침를 잘 가꾸어 드리고 싶었겠지요.
그래서 융릉엔 당시엔 하지 않던 병풍석을 둘렀습니다. 병풍석엔 모란과 연꽃을 화려하게 수놓듯 새겼습니다. 물받이 용도로 올려놓은 인석은 연꽃봉오리입니다. 연잎이 봉오리를 감싸듯 받치고 있는데, 이제 며칠 기다리면 막 피어날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정말이지 우리네 12간지 목숨들을 거두어주려는 것인지, 연꽃봉오리마다 12간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무덤 둘레에 병풍석 아래로 박은 와첨석은 진실로 아버지의 안녕을 바라는 효심의 발로겠지요.

      △ 건릉(정조의 능)의 단정한 난간석

아들 정조 대왕의 건릉과 견주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느껴집니다. 건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있지요. 난간석도 정갈한 멋은 있지만 융릉과는 화려함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융릉의 석양과 석호

그 밖에 사도 세자의 능을 지키는 석물들마다 정조의 효심이 묻어 있습니다.
석호와 석양이 밖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물샐 틈 없이 왕을 지키려는 것이겠지요. 흔히 석양은 왕을 모시던 내시라 하고 석호는 능을 지키는 경호원이라고 합니다.

△융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융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참으로 미남자들입니다. 문인석은 조선 선비의 결기와 단정한 기품이 깃들어 있습니다. 무인석은 좀 더 특별하더군요. 보통 목이 몸에 달라붙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석물들이 많은데, 융릉의 무인은 목이 시원하여 장쾌한 맛이 납니다.

△지붕돌의 화려함이 다른 융릉과 건릉의 장명등 

장명등은 또 어떤가요? 한껏 치솟은 추녀와 기와의 곡선을 겹겹이 섬세하게 살린 것도 아름답지만 매난국죽 꽃문양도 화려합니다.

△건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역시 건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다시 기술적으로 퇴보한 듯합니다. 문인석은 온화하되 결기가 부족하고 무인석의 목은 다시 몸에 붙어 미욱해 보입니다.
마음이 기술을 뛰어넘는 것일까요? 다들 입을 모아 융릉에는 정조의 효심이 묻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을 석물들을 보면서도 느끼겠더군요.

△융릉 전경. 정자각 뒤로 능침이 보입니다.

정조는 폐서인의 신분으로 양주 배봉산에 묻힌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 세자로 추존하고 이름을 ‘영우원’으로 바꾸었다가 끝내
즉위 13년 만에 이곳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지요.
‘융릉’이란 이름을 얻은 건 훨씬 뒤 고종 황제 때 정조를 ‘정조 대왕’으로,
장헌 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나서입니다.
배봉산 아버지 묘(수은묘)의 관에 찬 물이 뚝뚝 떨어질 때
아들 정조의 가슴에는 눈물이 강이 되어 흘렀겠지요?

이제 두 부자가 화산 땅에 함께 묻혔으니 살아 있을 때 나누지 못한 부자의 정을 나누고 있을까요?
융릉 올 때마다 정조의 ‘사부곡’이 들리는 듯하고 사부곡 뒤에 가려진 조선 왕조의 질곡이 안타깝습니다. 결국 노론의 정치에 패배한 세자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세도 정치라는 왜곡된 역사로 가는 서막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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