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바로 그 곳

의림지에서 삼한 시대 저수지의 흔적을 찾다

                                                                                                           글 * 하늬바람

 

                                                         관련 교과: 초등 사회과탐구 6-1 1. 하나로 뭉친 겨레,
                                                                        중학 국사 1.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


벼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쌀’을 먹었을까요?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대략 10세기경입니다.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 남경 마을에서 볍씨가 나왔고, 광주의 신창동에서도 비슷한 볍씨가 나왔습니다. 평균 길이 4.3~4.5mm, 평균 너비 2.5mm의 짧고 뭉툭한 볍씨였습니다. 물론 두 마을 외에도 여러 곳에서 벼농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때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논에다 물을 대고 빼는 수로도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요. 울산, 광주, 논산 등 여러 곳에서 논자리와 수로의 흔적도 발굴되었습니다. 안동 저전리에서는 2800여 년 전의 저수지가 발굴되어 벼농사와 저수지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된 곳도 우리나라입니다. 1만 5천여 년 전의 볍씨가 창원 소로리에서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었지요. 하지만 그 볍씨만으로는 벼농사를 지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더 연구가 필요하지요.)


                                화면 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은 의림지

 

삼한에선 벼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도 만들었어요!

청동기 시대에 시작된 벼농사는 초기 철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삼한 사람들은 벼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중요했습니다. 벼는 따듯한 기후와 물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한 사람들은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수지는 사람들이 인공으로 물을 가두어 모아두는 시설입니다. 흐르는 물줄기를 이용했겠지요. 물을 가두기 적당한 곳에 제방을 쌓아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가뭄이 들었거나 물을 대주어야 할 때 물을 끌어다 쓰면 농사를 더 잘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도 알았던 것입니다.

                  
삼한의 대표적인 저수지들

그 저수지 가운데 유명한 것이 제천의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상주 공검지 등입니다. 벽골제나 수산제는 지금은 저수지는 없고 수문과 제방이 남아 있습니다. 의림지는 지금도 저수지가 남아 있는데 용두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가두어 저수지를 만들었답니다. 그래서 계곡물을 가둔 흔적을 찾아보았습니다. 물은 의림지에 가두고 모래와 흙은 용추 폭포를 통해 홍류동으로 내뱉게 하였다더니 저수지 수문 아래 천 길 낭떠러지처럼 가파른 계곡이 보입니다.


                 수문 아래 깊은 골짜기. 용두산 계곡의 물을 가두었다는 게 실감나요

 

의림지의 역사는?

지금 의림지의 주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일대입니다. 본래 의림지는 임지라 했습니다. 그런데 앞에 ‘의’자 붙은 건 제천의 옛 이름이 의원현 또는 의천이었기 때문이지요. 고려 성종 11년에 군현의 이름을 바꿀 때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 후 제천의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이지요. 의림지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에 나와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도 “별호인 ‘의천’과 ‘의원’에서 의림지의 명칭이 태동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때 가야금으로 유명한 우륵이 용두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하는 주장과 그 후 700년 뒤 이 고장에 부임해 온 현감 박의림이 축조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의림은 못 주위를 3층으로 석축을 쌓아 물이 새는 것을 막았고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 관이 넘는 큰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 기둥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바닥에는 ‘박의림’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런 두 가지 설이 있지만 정설은 삼한 시대의 저수지로 보는 것입니다. 서기 229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세종 때와 세조 때 정인지가 다시 고쳐지었고, 일제 시대 때 수문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 큰 홍수가 나 둑이 무너져 다시 고쳤습니다. 그때 의림지 바닥에 큰 샘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답니다.

보수 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 시대의 농업 기술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콘크리트로 막은 지금의 수문

 

지금은 아름다운 유원지가 된 의림지의 옛 흔적을 보고 싶은 마음…

사실 나의 외갓집이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아래라 의림지는 아련하고 정다운 그러나 흐릿한 한 장의 흑백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의림지는 너무도 깔끔하여 낯설기까지 하네요. 삼한의 다른 저수지와 달리 의림지는 지금까지 저수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눈앞의 의림지에서 삼한 시대의 흔적을 연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삼한 사람들은 저수지를 만들어 활발하게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역사책의 한 줄 기록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 한 자락만 의림지 물에 담그고 온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의림지 물 들어오는 쪽인 것 같아요.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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