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 삼국통일 전쟁의 현장, 호로고루(瓠蘆古壘)

글: 하늬바람~ 



고구려 성 호로고루. 멀리 동측 성벽(길이 약 80m, 너비 29m, 높이 약 10m). 성벽의 전체 둘레는 401m로 넓지는 않다. 성 전체는 삼각형의 평지가 펼쳐진 모습. 중간쯤에 1.2m 높이의 단으로 구분되며, 성벽에서 서쪽 꼭짓점을 이루는 데까지는 150m.사진:문화재청)

<뜻밖의 만남>
임진강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흐르는 강입니다. 현무암 단애가 강의 깊이를 더해 주는 강입니다.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 두류산에서 발원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연천군 남계리에서 만난 한탄강을 품고서 서남쪽으로 달리니, 그 끝에는 서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강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지역으로 삼국통일 전쟁의 역사 또한 품고 있더군요.
임진강 가에 자리한 여러 고구려의 성들. 그 가운데 ‘호로고루(瓠蘆古壘)’라는 특이한 이름의 고구려 성.
호로고루성 지를 찾아간 건 아주 우연. 전곡리 선사 주거지를 답사하고 나오던 길이었지요.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성이 매소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인데, 뭔가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당이 힘겨루기를 했던 흔적이 있지 않을까, 그런 궁금증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무암 단애를 성벽으로 삼은 호로고루. 동쪽만 성벽을 높이 쌓은 강안성으로, 임진강 가에는 호로고루와 닮은 성들이 더 있다. 연천 고구려 3대성으로 꼽히는 당포성과 전곡 은대리 토성이 그것.(사진:문화재청)

  <호로고루의 뜻은?>
참 많은 이름이 있더군요. ≪三國史記≫와 ≪長湍誌≫ 등에 나온 이름은 ‘표하(䕯河)’, ‘호로하(瓠瀘河)’, ‘호로탄(瓠蘆灘)’, ‘표천(瓢川)’ 등. 모두 표주박이나 조롱박이란 의미를 담고 있네요. 지형이 조롱박의 목처럼 좁아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원래 호로고루는 ‘고을’이란 뜻의 ‘호로’와 ‘성’이란 뜻의 ‘고루’가 합쳐진 말이라고도 하고, ‘강 유역의 성(城)’이라는 의미로 쓰인 여진족 말인 ‘홀고루’가 시간이 흐르면서 ‘호로고루’가 되었을 거라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정말, 성은 이름답게 임진강 하류의 고랑포 나루까지 이어지는 현무암 절벽 위에 쌓은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었습니다. 수직 절벽과 깔때기를 떠올리게 하는 참 독특한 성. 성 위에 봄바람은 강물처럼 가슴에 시원하게 흐르고, 처음 만난 호로고루 성은 아주 먼 과거로 나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목책이 끝나는 지점 왼쪽 옆으로 얕은 호로탄이 흐른다. 칠중하, 신지강으로 불렸던 임진강(臨津江)이 임진강으로 바뀐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선조는 이 강을 건너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듬해 1593년 10월에 다시 임진강을 건너 환도하게 되었고, 임진 나루에 다시 돌아왔다는 뜻으로 임진강으로 부르게 되었다.

<말을 타지 않고 건널 수 있었던 여울>
호로고루 성 아래로 흐르는 강은 임진강 그 어느 곳보다 얕은 여울입니다. 본래 임진강 하류에서 고랑포까지는 수심이 깊은데, 호로고루 부근만은 배 없이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테지요. 당연한 상상? 아마 고구려장수왕도 절벽 위의 강안성인 호로고루를 거점으로 삼아 이곳을 건너 한강 북쪽 아차산성까지 진군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북쪽으로 진격할 때도 호로고루 앞 여울을 지나 의정부 방향으로 가는 장단길이 주로 이용되었으리라 짐작되는군요. 일종의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였던 이 길은 고려, 조선시대는 물론 6.25 전쟁 당시에도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던 길이라고 합니다.

   

호로고루의 동측 성벽의 바깥쪽 

<성벽 돌에서 고구려가 느껴지네>
처음부터 호로고루가 석성은 아니었습니다. 동쪽 성벽의 아래에 기둥구멍들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볼 때 4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목책만 있었던 듯합니다.

장수왕이 남하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일대를 차지하였을 때는 어땠을까요? 알 수 없네요. 하지만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연합작전으로 한강을 잃고 난 다음에 임진강과 호로고루는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방어선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고구려는 호로고루 성을 크게 재정비하였습니다. 우선 북쪽 땅이 남쪽보다 낮아서 흙을 쌓고 다져서 땅을 편평하게 하였습니다. 남쪽과 북쪽은 현무암 절벽이기 때문에 성벽은 동쪽만 쌓아도 되지요. 동쪽 성벽이 들어설 곳에 우선 1m 높이로 판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판축한 곳 가운데에 폭 6m에 높이 10m로 흙 둔덕을 쌓고 여기에 안팎으로 돌로 성벽을 쌓았지요. 이른바 협축법(夾築法).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언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성벽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하여 암반에서부터 다시 보축성벽을 쌓고 그 위를 경사지게 흙으로 판축을 하였지요. 이제 밖에서 보면 성벽은 하나의 큰 둔덕으로 보이네요. 여러 성축 방식이 적용된 전 과정이 물론 고구려인의 솜씨는 아니고, 통일신라시기를 거치면서 계속 보축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판축한 흙이 무너져 내린 곳에 석성의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성벽 돌은 구멍이 송송 뚫린 검은 빛을 띤 현무암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현무암을 잘라 다듬었을 것입니다. 돌들은 납작한 방형.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에서 자유자재로 석성을 쌓았던 ‘고구려 성’임을 실감하게 되네요.


   호로고루 출토 연화문 와당(사진:문화재청)

<고구려의 기상이 담긴 와당! 성안에는 기와집이 있었다!>
비록 성의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성 안에 기와집이 있었다? 전통적인 고구려 양식의 수막새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한 지역 그 어느 곳보다 기와 조각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네요. 와당뿐 아니라 치미전돌이 나온 걸 보면 상당히 지위가 높은 장수가 상주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연화문 와당은 투박하기는 해도 전형적인 고구려의 수막새입니다. 회색이나 회청색을 띠는 백제나 신라의 기와와 달리 고구려의 기와는 주로 붉은색, 황갈색이지요. 고구려는 고운 진흙으로 기와를 굽지요. 또 가마에 공기를 차단하지 않고 굽기 때문에 흙 속의 철 성분이 산화되어 붉은 빛을 띠도록 합니다. 아마 붉은 빛의 장엄함을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빛깔뿐 아니라 여섯 장 연화문 수막새는 섬세하지는 않으나 호탕한 기상이 느껴졌습니다.


발굴 당시 와적  모습(사진: 문화재청) 

<식량 저장 창고도 있었다!>
그밖에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나왔더군요. 시루, 접시 같은 그릇 토제벼루, 흙으로 굽거나 돌로 깎은 저울추, 관모형 토제품과 남자들의 소변용기인 호자도 나왔습니다.
쌀, 좁쌀, 콩, 팥 같은 탄 곡물들도 나왔고, 6종이나 되는 동물의 뼈도 나왔습니다. 소, 말, 개, 사슴 등으로 2차 발굴 조사 때의 일이지요. 곡물과 뼈가 발견된 지하 창고의 깊이는 3m로 바닥엔 통나무를 깔았고 벽은 돌로 쌓았습니다.
이 모든 유물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네요. 이곳은 상당히 오랫동안 고구려 병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남쪽 강가 쪽으로 목책을 조성해 놓았다.

<호로고루에서 삼국의 말발굽 소리를 듣네>
본래 땅이란 그곳에 사는 자의 것이지요. 정해진 주인이 하나일 수 없을 터. 그중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침이 심했던 곳은 한강 그리고 그 한강에 흘러드는 임진강인 듯싶네요. 그래서 고구려 성으로 알려진 호로고루에도 백제, 고구려, 신라의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쳐 관미성 등 한강 이북의 58성을 차지한 396년부터 선덕여왕이 집권하던 638년까지는 임진강 일대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하자 한강 일대까지 고구려의 땅은 확대되었다가, 553년 진흥왕이 한강 하류까지 차지해 버리자 고구려의 최전선은 임진강으로 좁혀졌으리라 여겨지네요.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와 신라가 격돌하게 되었을 때는 임진강은 초비상 상태였겠지요. 문무왕 2년(662), 호로하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하던 기록도 있습니다. 김유신이 소정방과 함께 평양성을 칠 때 식량 부족과 군사들의 피로가 쌓여 퇴각을 할 때입니다. ‘병사들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이 쫓아와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동사강목》의 기록입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할 때 김유신 장군이 당군에게 군량미를 보급하려고 임진강〔칠중하〕를 건넜다고 합니다. 호로고루 주변을 지나 평양성으로 갔다는 것. 이때에 이르러서는 임진강 일대가 신라의 수중으로 떨어진 것일까요?

허물어진 망루. 역시 현무암으로 쌓았다. 강 남쪽의 백제 성 육계토성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쌓았다.

그러나 임진강 일대는 다시 나당 전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당나라군은 한 번도 임진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지요.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서 최후의 나당 전쟁 즉, 삼국통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대전리성으로 알려진 매소성(매초성) 전투.

그보다 2년 전인 문무왕 13년(673)에 병선 100척을 이끌고 침범한 당군을 맞아 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한때 당의 유인궤가 임진강 북안의 호로고루를 근거지로 삼고 임진강 남쪽의 칠중성을 공격했다지요. 같은 전투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라군은 적군과 아홉 번을 싸워 이겨 적병 2천의 머리를 베었고, 호로탄에 빠져 죽은 적병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옛 성벽에서 고구려를 만난 기쁨> 
옛 성벽에 핀 제비꽃은 아름답습니다. 역사의 흔적과 상관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제비꽃을 보노라니 왠지 가슴이 뭉클합니다. 아, 호로고루의 의미는 아직 여기에 있구나!

호로고루의 지리적인 의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호로고루의 성벽에 올라 넓은 들을 적시며 흘러가는 임진강을 보고 있으면 1400여 년 전의 삼국의 역사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남한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이 주는 남다른 감회를! 봄바람에 웃는 제비꽃이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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