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하얀 동그라미

사연많고 한 많은 어린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홍수로 인해 물이 밀려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린 선왕을 익사시켜 죽였다는 말은 듣고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옆에서 직접
지켜보던 영월 관리들의 배려였는지 읍내 관청 건물로 단종을 옮겼습니다.

관풍헌입니다.
목숨이 추풍낙엽같은지라 무심히 들리는 소쩍새의 울음조차 내 슬픔에 겨워 함께
흐느끼며 한수 한수 시를 지었던 자규루.

그러나 윤유월 한여름 더위에 지쳐가며 듣도 보도 못한 강원도 첩첩산골 영월땅에 도착한지 4개월만에 사약이 내려집니다.
왕위를 찬탈한 삼촌이 열일곱 어린 조카에게 내린 사약.
소복보다도 더 시리도록 흰 빛의 백자에 담겨진 검은약 한사발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청령포 가기 전 주차장 부근에는 단종에게 내릴 사약을 전해주고 돌아가며 비통함과
죄책감에 시 한수 읊어놓고 간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습니다.


천 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쿨럭 쿨럭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동강의 물소리가 마치 자신의 통곡소리처럼 들렸겠지요.
차마 맘 놓고 울지도 못하는 애통하고 비통한 마음이 느껴지는듯 합니다.

시신 수습조차 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에 동강의 물결따라 오르내렸을 어린 시신을 거둔 사람이 영월 호장 엄흥도입니다.
가까이서 몇개월을 지냈으니 왕이 아니라 자식같은 마음도 들었겠지요.
한밤중 남의 눈을 피해 양지바른 땅을 찾아 가매장을 해 두고는 후환이 두려워 그는 식구들을 데리고 야밤도주를 합니다.
하지만 참 고맙게도 그 땅이 그렇게도 좋은 명당이라네요.
"갈용음수"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세종을 할아버지로 문종을 아버지로 하여 크고 큰 사랑 속에 원자로 태어났지만 3일만에 어머니를 잃고 12살 어린 나이에 돌봐줄 어른도 없는 상황에서 왕으로 즉위를 한 단종입니다.
하지만 즉위 3년만에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왕좌를 약탈 당하고 상왕이 되었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내려온 유배지에서 결국은 폐서인이 되어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이 후 8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중종이 가매장했던 곳을 찾아내도록 했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그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영월수령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서 자신이 묻혀있는 곳을 가르쳐주었기에 겨우 찾아내었다고 합니다.
장릉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있는 낙촌 박충원의 정려비각입니다.

하지만 단종으로 복위가 되고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은 것은 180여년이 더지난 숙종때입니다.
능에서 재실로 내려오는 길옆에는 엄홍도의 정려비각이 홍살문과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해 장릉은 여늬 능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산등성이 높은 곳에 있는 능에서 절벽처럼 뚝 떨어지는 아래쪽에 있는 홍살문과 비각입니다.
더구나 4개월 동안의 유배기간동안 진심으로 보필한 신하들과 노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사람들이 장판옥에 이름이 올려져 있습니다.


더욱더 특이한 것은 4개로 나뉘어져 있는 배식단입니다. 장판옥을 마주하고 홍살문 왼편에는 높이가 다른 사각 전돌판이 있어서 각기 신분의 고하에 따라 제사를 함께 지낸다고 합니다.


더구나 장릉의 제실은 역대 어느왕릉에서도 볼수 없을 만큼 큰 재실입니다.


비록 살아생전에는 그 어떤 누구도 겪지 못할 참담한 일을 당했지만 영혼만큼은 편안하길
기도하며 돌아나온 장릉이었습니다.

지금의 영월은 500여 년전 유배당한 어린 왕을 4개월동안 보살피고 시신까지 챙겨준 음덕
덕분인지 단종관련 유적지로 많은 관광객을 맞이합니다. 
덕분에 만만치 않은 관광수입과 충절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마을이 되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진심에는 반드시 밝은 보답이 있나 봅니다. 
살면서 뭔가 허전하고 가슴시린 날에는 나보다 더 우울했을 단종을 만나 위로도 할겸 영월로 떠나보세요.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