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동그라미

9월 2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을 장식한 일본이 미군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입니다.
1941년, 태평양 하와이섬의 진주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군을 향해 쏟아부은 일본공군의 폭격..
그로부터 4년 후 일본은 도쿄상공에서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미군의 소이탄과 두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항복의 흰깃발을 올립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패전했음을 발표하는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서  덕분에 우리도 36년 식민지의 오명을 벗고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음달인 9월 2일
요코하마에 정박 중인 미주리 전함 위에서 2차세계대전의 완전한 종식을 뜻하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때 한쪽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집고 일본측 대표로 나와서 사인을 한 사람이  일본외무상 '시게미츠 마모루' 전권대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굴욕의 현장을 지킨 한사람 쯤으로 기억하는 이 사람은 사실 우리에게는 좀 더 굴욕적인 사연이 있는 사람이랍니다. 과연 어떤 일 일까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일본은 이미 중국을 향하여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조작된 상하이사변으로 인해 승리를 쥔 일본군은 그 기쁨을 누리고자 일본 천황의 생일에 맞추어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아주 큰 축하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혹시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중국인이 공원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지요.


하지만 그날 관중 속에 조선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는 젊은이가 한명있었음을 일본은 몰랐던 것입니다.
김구의 한인 애국단 소속의 '윤봉길'입니다.


단상위에는 중요인물들이 다 올라가 있고 21발의 축포와 함께 천황을 찬양하는 기미가요가 연속으로 불리워졌습니다. 그때 던져진 폭탄과 사람들의 비명소리..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발밑에 폭탄이 떨어져 즉사 하고 당시 상하이 공사로서 단상 위에
있던 시게미츠 마모루는 오른쪽다리를  잃게 됩니다.

사건 직후 현장에서 곧바로 붙잡힌 윤봉길은 당당한 모습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요.
윤봉길은 사형 당할 때 죄인으로서 천황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짧은 십자가형틀에 묶고 형틀을 땅에 박았지요. 총살형으로 이마에 관통상을 입은 윤봉길의사는 죽으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릎을 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일본군이 만들어낸 조잡한 잔꾀입니다. 

하지만 마음 속의 펄펄끓는 독립의지만큼은 어떠한 폭력으로도 꺽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25살 젊디 젊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진 한 젊은이와 그로인해 한쪽 다리를 잃고 살아남아 패전의 현장에서 비참하게 항복 조인식에 사인을 해야 했던 일본제국주의의 관료... 과연 누구의 삶이 더 값진것일까요?

홍커우공원 폭탄사고 이후 미게미츠는 10kg이 넘는 무거운 의족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녔습니다.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조선의 젊은이 윤봉길에 비하면 A급 전범으로 실형까지 살며
노후를 맞이하는 시게미츠의 삶은 절룩거리는 모습과 함께 참으로 불쌍해 보입니다.

태풍이 지나가는 9월을 보내면서 서슬퍼런 윤봉길 의사와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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