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의 흔적 그리고 정조

 글: 하늬바람~ 

길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호기심도 깔려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갈라치면 여기가 옛날엔 어땠을까, 이 길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궁금해지지요. 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길에 대한 관심이 벌컥 솟아날 때도 있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일까요? 아직 후텁지근한 바람이 살갗을 척척 휘감는 여름 오후였지만 그래, 해거름이면 서늘한 서풍이 불지도 모르지, 그렇게 위안하며 오늘은 길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났습니다.

215년 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뵈러 갔던 을묘 원행 길. 그 중 <환어행렬도>에 남아 있는 시흥 행궁과 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만안교를 찾아갔습니다.

 

환어행렬도. 《화성행행도팔첩병 [華城行幸圖八疊屛]》중에서 가장 멋스러운 그림이 아닐까? 갈지(之)자 구불구불 길에 산천이 호응하고, 어가 행렬을 맞이하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엎드려 조아리는 사람은 없다. 을묘 원행이 얼마나 대단한 행렬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아버지 사도 세자의 죽음 위에서 즉위하였지요. 어찌 보면 정조는 끊임없이 짓누르는 ‘개인적 복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어깨 위에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넘어 당쟁을 혁파하고 조선을 개혁해야 할 책무가 걸려 있었지요. 그러나 정조가 과연 ‘개혁 군주’로 성공했는가, 또한 갈 길을 명확히 제시하였는가에 대한 이론의 여지도 있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요. 왕권을 강화하는 것은 ‘보수’요, 근대적 길을 여는 것은 ‘진보’이니, 그 힘겨운 싸움 안에 던져져 있던 ‘왕’이 내딛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용기이자 고통이며 한계였을 것입니다.

정조는 왕이 되고도 양주 배봉산에 폐서인이 되어 묻힌 아버지의 묘(수은묘)를 천장하지는 못하였다. 그저 장헌 세자로 추존하고 이름을 ‘영우원’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리고 13년을 기다려 지금의 융릉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짓고 수시로 화산 현륭원을 행행(行幸)하는 자체가 노론으로부터 왕권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요,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95년 을묘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동시에 사도 세자의 구갑(회갑)이 든 해이기도 했죠. 아직 수원성(1796년)은 완공하지 못하였지만 노론을 향해 왕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정조는, 수원 행궁에서 성대한 회갑연을 열었습니다. 봉수당 회갑연은 어머니 혜경궁만을 위한 잔치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노량진을 건너 두 갈래 길이 보인다. 분홍색 길은 처음에 이용했던 과천길, 초록색 길은 오늘날 1번 국도와 거의 일치하는 시흥 - 안양길이다.

을묘년 8일간의 원행 중 정조는 시흥 행궁에서 이틀을 묵었습니다. 1795년 윤 2월 9일 가는 길에 그리고 15일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룻밤. 그 중 돌아오는 행렬을 그렸으니, 그 환어 길을 좇아가 보겠습니다.

다리 위에 해그늘이 지고 있다.

<남아 있는 것, 만안교>
정조의 원행을 편히 하기 위해 새롭게 놓은 다리입니다. 을묘년 9월에 놓았다니 윤 2월 원행 때는 본래의 나무다리를 건넜겠지요. 그 후 바로 축조한 다리는 임금의 행렬이 지나가야 하니 너비가 넓어야 합니다. 길이가 31.2미터, 너비가 8미터 되는 돌다리입니다. 창덕궁 금천교보다야 좁지만 창경궁 옥천교보다 넓습니다.

비록 모양낸 난간도 석수도 없지만 긴 장대석을 가로 세로로 짜 맞춘 다리가 해그늘 속에서 더욱 시원해 보였습니다.

늦은 오후 서늘한 그늘에 의지하여 아주머니 두 분이 다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어제의 역사가 오늘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사셨을 터이니 이 다리가 정조가 건너던 다리라는 걸 알 테지요. 하지만 무람없이 건너고 앉아서 쉬면서 오히려 다리는 지금 사람의 다리로 살아 있네요.

 

 
만안교 아래쪽과 위쪽. 기둥이 다르다.

조선 후기의 돌다리(石橋)를 대표하는 만안교는 일곱 개의 홍예가 받치고 있습니다. 11개의 장방형 돌을 둥글게 쌓아 일곱 무지개를 세웠습니다. 눈썰미 있는 이라면 물을 마중하는 쪽과 배웅하는 쪽 다리가 모양이 다르다는 걸 알아채겠지요. 물이 흘러내리는 쪽은 기둥을 유선형으로 깎았습니다. 그래야 유속을 견뎌 다리가 무너지지 않겠죠.

살결이 느껴지는 석조물은 아름답습니다. 손으로 만져도 따스하고, 눈으로 느껴지는 무게감, 그리고 선. 직선인 것 같지만 곡선으로 흐르는 멋은 가슴으로 와 닿습니다.

 

다리 아래께 징검다리에서 총총총 뛰노는 남매의 신발. 이들이야말로 215살 먹은 만안교의 현재를 빛내주고 있었다.

 

만안교 축조 내력을 적어 놓은 비

해거름 직전의 햇발이 만안교 비각 위로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경기 감사 서유방이 3개월에 걸쳐 다리를 축조했으며, 처음엔 과천 길로 다녔지만 고갯길이 많기도 했거니와 사도 세자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김상로의 형인 김약전의 묘를 지나가야 했기에 좀 더 편안한 시흥 행궁 길을 열었고 이곳에 만안교를 세우게 되었다는 내력이 비석에 씌어 있습니다. 위치도 460미터(200미터 의견도 있음) 더 남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환어행렬도>에서 만안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안양교 앞에 이르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자궁에게 미음과 다반을 드렸다.”고 하니 그림의 푸른 휘장을 친 혜경궁의 가마 앞의 몹시 굽은 길 화폭 너머에 그때는 나무다리였던 만안교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네요.

 

금천현 관아가 있던 자리. 왕의 행행을 위해 원래 있던 금천현 관아에 114칸의 행궁을 지어 원행 길을 도왔다. 현재 금천구 시흥5동 동사무소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라진 것, 시흥 행궁>
행차 7일째인 윤 2월 15일 정조는 둘째 날과 똑같이 시흥 행궁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마를 타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는군요. 가만히 앉아서 가는데 무엇이 어려울까 싶지요? 하지만 두꺼운 방석을 깔고 앉아도 덜컹덜컹 거릴 때마다 울렁거리고, 하긴 긴 시간 앉아서 가자면 고역이겠다 싶습니다. 하여 혜경궁도 창덕궁 후원에서 가마 타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먼 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정조는 중간 중간 행렬을 멈추고 청포장(靑布帳)을 치고 미음을 올렸지요. 그리고 직접 미리 행궁에 가서 살피고 임시로 쳐 놓은 장막에 나와 어머니를 기다렸다가 모시고 들어가곤 하였다지요. 정조의 그런 효성을 <시흥환어행렬도>에선 엿볼 수 있습니다.

시흥 행궁은 을묘년 원행을 위해 새로 지은 집이었습니다. 정조는 방이 따듯하게 잘 지어졌다고 시흥 현령 홍경후에게 3품직을 내리고 향청의 우두머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시흥 행궁에서 떠날 때는 문성동 앞길에서 직접 백성들을 만나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 일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임금의 귀를 번거롭게 할 만한 질고가 없다고 하고, 다만 호역에 두 번 징발되는 것이 폐단이라 하였지요. 그러자 왕은 지난해의 환곡을 탕감해 주고, 호역의 폐단을 줄이라 하고, 정월에 임금이 행차하면 눈을 치우느라 백성들이 고달프니 봄 ․ 가을의 농한기에 하겠다고 했답니다. 한 노인이 먹을 것을 달라 하자 몇 말의 쌀을 주라고도 하였지요.

800살도 더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행궁 자리임을 말하고 있다. 

시흥 행궁은 사라졌습니다. 은행나무만이 역시 마을 노인들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길은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길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이 시흥 행궁 자리였다는 것을 안 것은 최근이었지요. 그래서 사라진 것은 쓸쓸합니다.

그래도 <환어행렬도>를 찾아가는 길에서 210년 전에 죽은 정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조는 미국이 독립선언(1776)을 하고 프랑스가 혁명(1789~1794)을 하던 때의 사람입니다. 그러한 세계사적인 흐름을 알지는 못했지만, 역시 그도 개혁의 과제는 피할 수 없었지요. 수원화성 축조도 능행도 개혁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아 있는 석교와 사라진 행궁 사이에도 정조의 역사적 의미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지난해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유명을 달리한 대통령도 떠올랐습니다.

 

※<환어행렬도>는  http://cafe.naver.com/gypsymuseum/854에서 옮겨 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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