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의 일기》, 제중원 이후의 알렌


                                                                                            글:봄뫼


요즘 한창 제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인기 리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역사란 일어난 사실을 다루는 학문인데 반해, 드라마란 창작된 스토리를 기본으로 하니
사극은 그 자체가 이런 이율배반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고 사극을 보아야  실제 역사와  드라마를 혼동하지 않겠지요.


제중원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알렌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국가 간의 일들은 철저히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사실 최초의 서양의료 기관인 제중원과 알렌의 관계를 보아도
돈을 대고 병원을 세운 주체는 명백히 고종과 우리 정부인데 그동안 알렌의 역할만
강조되어 왔죠.

알렌은 철두철미하게 자기 나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사람인데 말이죠.

알렌(Allen,H.N., 安蓮,1858~1932))은 미국공사관 무급의사로 조선에 살게 되었습니다.
알렌은 민영익을 치료해 주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고 고종의 지원으로 제중원도
세웁니다.
알렌이 나중에 회고록처럼 쓴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 출판부,
김원모 역, 1991)에는 제중원이 세워지는 과정과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알렌의 활동이
잘 기록되어 있지요.

    

 △ 제중원과 알렌: 제중원은 1885년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의료기관입니다.
     알렌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의사로 1884년 9월 조선에 왔어요.


가장 영향력있는 외국인

민영익을 치료하고 제중원을 설립한 후 알렌은 고종, 명성황후, 왕족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영국,  청나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외교관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지요.

알렌은 당시 복잡한 외교, 정치 상황과 빠르게 변하는 세상 물정에 대해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어서 고종의 여러 질문에 의견을 내놓기도 해서 더더욱 고종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알렌 스스로가 자신이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었다고 자신할
정도였다는 것은 알렌의 일기에 쓴 다음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886년 11월 11일(토)

이제 내가 서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외국인이 되었다. 국왕은 국정의 모든 문제를 나와 협의하면서 언제나 내 충고를 채택하곤 했다. 나는 아메리카 무역상사를 위해 금광채굴권을 획득하였고 일당 250달러를 지급받았으나 일부는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조선정부로부터 참판관 벼슬을 받았고, 또한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금주부터 공사업무를 시무하기 시작했다.

  
자신감과 함께 일말의 오만함도 보이지 않나요?

청의 방해를 물리치고 주미조선공사관 개설

1887년 가을 미국공사관 일을 하게 된 알렌은 초대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사실 워싱턴까지 가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청나라의
간섭이었습니다.

 초대 주미공사관 일행: 왼쪽 앞줄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재연,
     뒷줄은 수행원들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기 때문에 조선 스스로 대사를 파견해서는
안된다면서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렌은 끝까지 조선의 전권대사의
신임장 제정과 주미 공사관 개설을 주선했습니다.
이것은 알렌이 무슨 의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조선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봐야죠.


1888년 1월 13일(금) 위싱턴에서

주미청국공사 장음환은 조선 공사가 워싱턴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 공사관을
방문, 자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통박하고 있었다. ...
우리는 1월 17일 화요일에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예방, 국서를 제정했다.
나는 O가에 소재한 아담한 건물 하나를 임대해 주미 조선공사관으로
임시사용하게 하였다.

 

조선의 독립유지는 미국의 이익

알렌은 조선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1890∼1893),
임시대리공사(1893∼1897), 전권공사(1897∼1905) 가 되었는데
외교관으로서의
알렌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미국의 이익이었습니다.


알렌의 초청으로 미국공사관에서 열린 회의(1903년): 오른쪽 두 번째부터 독일, 프랑스,  미국,
    청나라, 영국, 왼쪽 두 번째가 러시아공사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 특별한 식민지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선이 일본이나 청나라나 러시아 중 어떤 한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유리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렌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도움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지요.

그러나  일본의 위협으로부터는 일단 벗어났지만 나라의 위신과 국왕이 권위는
무너졌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열강들의 이권 요구는 더욱 심해졌구요.

 

알렌 역시 고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미국의 이익에 맞는 여러 이권을 받아냅니다
평안북도 운산 금광 채굴권, 경인철도 부설권, 서울전기, 수도시설, 서울 전차 부설권
등을 차지했지요.

 

운산금광(1895년): 미국은 운산금광에서 40년 동안 80 여t의 금을 캐갑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에서  군수물자를 빠르게 실어 나르기 위해 조선의 철도 부설권에
집착했습니다. 
알렌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미국의 이익을 보장받으면서 일본을
도와 주었다는 것을 다음 일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 경인선철도: 1900년 경인선철도 서대문역입니다. 경인선철도 부설권은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인 모오스가 가졌어요. 하지만 공사자금이 부족해지자 권리를 일본에 팔았습니다.


1897년 7월 27일(수)

본인은 경부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인허하는데 조력했다....가토 마스오공사는...
“본인은 귀하의 원조가 필요합니다. 만약 귀하가 나를 도와준다면 미국상품구입에
본인은 전력을 기울일 것이며, 또 귀하가 오오에 타쿠가 제의했다고 말한 것처럼
모오스 사장을 통하여 미국 이권 증진에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알렌의 실체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알렌은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미국에 도착했어요. 

이 여행에서 알렌은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해서 개발하면 미국에 엄청난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대로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완전히 식민지로 할 경우 미국의 경제적 이권은 크게
손해를 본다고 판단했지요.
  
이런 결론을 내린 알렌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루스벨트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나 미국의 입장은 이미 러시아에 대항해 일본을 지지하는
것이었지요.

일본은 이런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믿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마침내 이기게
됩니다.


△ 러일전쟁을 그린 독일 우편엽서: 러시아()은 프랑스의 지지(꼬리의 모자)를 받고 있네요.
    일본(기모노 여인)은 영국과 동맹(머리에 군함)  맺었어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에 반대한 알렌의 주장은 미국의 이익을 따진 것이지  대한제국을
위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이미 대한제국에 대해 포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 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03년 10월 14일(수), 톨레도

이미 황제가 만기를 총람하는 한국황제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나는 오히려 러.일 간의 사태에 관해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흥분이 되는
전쟁 발발뉴스를 듣고 싶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전승을 거둔 어느 한 쪽이 한국의
대군주 지위를 차지해서 허구적인 대한제국을 파괴하고 대신 한국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부여할 것이다
.


나라를 잃은 마당에 알렌이 말하는 ‘약간의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네요.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알렌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서 이권을 빼간 알렌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제중원을 설립한(명백히 설립자가 아닌데도) 의사로 아직도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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