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문화 ․ 유적 살펴보기 - 중국
제갈량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살아 숨 쉬는 무후사 (2)
참세상
* 죽어서도 함께하는 왕과 신하
무후사 경내의 제갈량 상
무후사 모습
무후사(武侯祠)는 유비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공이 큰 제갈량을 제사 지내는 사당입니다. 촉나라의 수도였던 중국 쓰촨성 청두(성도)에 있지요. 여기서 무후라는 이름은 제갈량이 죽은 후 받은 충무후라는 칭호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후사의 정전 옆에는 유비의 무덤이 함께 있습니다. 왕의 묘와 신하의 사당이 함께 있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고 하겠죠. 유비의 영정을 모신 누각을 지나야 제갈량의 위패를 모신 정전이 나오니 적어도 이곳에서는 유비와 제갈량의 지위가 뒤바뀐 듯합니다.
제갈량은 뛰어난 군사 기술과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가 어느 누구보다도 많았습니다. 유비는 그런 신하를 인정해주었고 제갈량은 그런 주인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비가 죽은 후 충분히 딴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그였지만 신하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신뢰'를 생각할 수 있겠지요. 처음 제갈량을 신하로 맞이했을 때, 제갈량에게 잘 대해주는 유비에게 관우와 장비는 불만을 가졌어요. 평생을 같이 보낸 의형제로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갈량을 불쾌하게 대했지만, 유비는 이를 막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제갈량의 충성이 유비가 믿어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전부일까요? 유비와 제갈량은 군주와 신하이기 전에 부모와 자식 같은 존재였습니다. 부모를 일찍 잃은 제갈량은 따뜻하게 대해주는 유비를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 공격이 최선의 방책!
무후사 경내.
당시 위나라는 인구 4백만이 넘고 병사는 20만~50만 명이 되는 삼국 중 가장 힘이 센 강대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촉나라는 인구가 90여만 명에 불과하고 병사는 8만~12만 정도인 가장 약소국이었습니다. 강대국 위나라에 비해 촉나라의 군사는 4대1 정도밖에 안되어 싸워서 이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제갈량 자신이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음 황제인 유비의 아들은 어리석고 놀기 좋아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나라의 모든 힘을 쏟아서 북쪽으로 무리하게 군대를 보내야 했을까요?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국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이 약한 촉나라는 갈수록 위나라의 힘에 눌려 결국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은 촉나라의 힘이 가장 최고에 달하고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위나라와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죠.
무후사에 있는 목각된 출사표.
제갈량이 최후를 맞은 오장원.
사람의 힘으로 안 되면 하늘에라도 기대려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외치면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나라 사람 마유기(馬維騏)가 썼다는 “하늘과 땅 영웅의 기세는 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늠름하다"이란 뜻인 '천추늠연(千秋凜然)' 편액이 제갈량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대변해주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