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학, 성균관 
                                                                        글:봄뫼


성균관, 고려를 이어 조선까지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성균관에는 문묘가 있어 공자를 모시는 문묘가 있고 중국과 조선의 유명한 학자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학문을 이어받아 학생들을 교육하는
게 큰 임무
였습니다.

      경조오부도(1861년)- 성균관은 창경궁 동북쪽 '문묘'에 있었습니다.

조선의 성균관은  고려시대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조선의 최고학부가 되었습니다.

성균관은 국자감(國子監)· 국학(國學)· 태학(太學)· 반궁(泮宮)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교육의 목적은 유교이념을 확실히 가르치고 관리를 기르는 것이었어요.

조선시대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양반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먹고 살기 바쁜 평민이 교육을 많이 받아 관리가 될 수는 없었지요.

 

학교로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학(공립학교)과 지방의 양반들이나 가문에서 운영하는

사학(사립학교)이 있었습니다. 관학으로는 지방마다 두었던 향교와 서울의 사부학당,

성균관이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당, 서재, 서원 등이 있었습니다.

 

서당은  지금의 초등학교 같은 구실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중,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것이
지방에서는 향교와 서원이었고 서울에서는 사부학당이었어요.
성균관은 대학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원, 진사는 되어야 성균관 유생

 

향교나 사부학당, 서원에서 공부를 마치면 누구나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대학에 들어가려면 시험에 붙어야 하는 것처럼
성균관도
과거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북새선은도권> 함흥방방도(1664년)-함경도 국경지대에서 과거 별시를 치른 후
     급제자에게 상을 주고 있습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크게 소과와 대과로 구분됩니다.

소과는 생원진사시, 대과는 문과라고도 했어요. 대과의 마지막 시험이 임금님 앞에서
보는 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소과, 즉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을 본과생(本科生,上齋生)이라 했는데, 정원은 조선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후기에
126명, 말기에 100명이었습니다.


15세 이상이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가끔 50세인 어른도 있었다고 하니
나이
제한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처럼 그렇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학생들은 많지 않았을 것 같네요.

왜냐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생원진사시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조선 후기에는

약 35세였습니다.  이 정도면 결혼해서 자식도 있고 심지어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소과에 합격했다고 해서 모두 성균관에 들어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입학정원이
차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의 생도나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자식  중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학문은 모름지기 사서오경!

 

성균관에서 하는 공부는 모두 유학이었습니다. 유학에 어긋나는 학문은 금지했습니다.

노자와 장자사상이나 불교에 관한 책도 금지되었습니다.

또 유학이라고 해도 성리학과 다른 이론이나  유학 이외의 여러 학문에 관한
백자가집은
읽으면 안되었습니다. 


▼서울문묘 대성전(사진:문화재청)

성균관에서는 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서ㆍ
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가르
쳤습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이고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과 춘추, 예기를 말하지요.

아홉 과목을 한꺼번에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웁니다.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통과
하면  논어재로  올라가고, 통을 받지 못한 자는 계속 대학재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ㆍ중용재ㆍ시재ㆍ서재ㆍ역재로 차례차례 나아
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례대로 공부해가는 것은 원칙이고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과목과
공부 방법이 달랐다고 하네요.

글짓는 공부도 했는데 주로 과거시험에서 주로 쓰는 문장인 제술을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유학에서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활쏘기도
배우게 했어요.

성균관 성적은 평생성적

 
조선시대 성균관의 기본적인 공부방법은 1개월 가운데 20일은 경서를 읽고,
4일간은 배운
것을 선생님 앞에서 책을 읽고 뜻풀이를 하는 시험을 보고,
6일간은 과거시험에 쓰이는
문장인 제술을 실시합니다.


모두 다 통과하면 기록해 놓았다가 왕에게 보고하여 나중에 문과 초시를 보게 했어요. 

월말에 그 달에 배운 공부와 시험 성적을  성적이 좋은 사람  5명에서 10명을
‘대성(大成)’
이라 하여 예조에 보고합니다.  예조에서는 왕에게 결과를 바칩니다.  

▲<알성시은연도>-1580년(선조13)에 왕이 문묘에 참배한 후 성균관에서 알성시를 보고
급제자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성적이 좋은 사람은 문과초시(관시,館試)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會試)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 이하는 모두 관시를 보게 하였지요. 그런데 사학에서 올라 온
기재생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모두 생원시를 보아야 했습니다.

 

성균관유생의 하루


성균관의 하루는 북소리로 시작합니다.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해 두 번째 북소리가 나면
옷차림을
반듯하게 하고 책을 읽습니다. 세 번째 북소리에 맞추어 진사식당에 가서
동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합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마다 출석이 기록되는데 아침과 저녁을 합해서 1점이고

300점이 넘어야 과거시험 볼 자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태학계첩>-성균관의 모습입니다.(서울역사박물관)

이제 공부시간이
되었네요.

교수들이 먼저
명륜당에 자리잡고
계시면
북을 칩니다.
유생들이 차례로
들어와 교수에게

절하고 자기 재(공부
과목) 앞으로
가서
동료끼리
절하고
앉습니다.

교수는 상재와 하재에서 한 명 씩 뽑아 책을 읽고 강을 합니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유생들은 읽은 책을 갖고 선생님 앞에서 그 날 배운 것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고 난 다음  새 것을 배웁니다. 성균관에서는 얼마나 많이 공부했나
보다는 자세하고
정확하게 뜻을 아는 공부를 중요하게 여겼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매월 초에는 정식 복장을 차려입고 문묘에 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성균관 유생은  생활태도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성현을 존경하지 않거나 조정에 대해 비난하면 처벌받았습니다.

장사해서 돈 벌 궁리를 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다든지 술과 여자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되고, 권세에 아부해 벼슬을 얻으려고 해도 안되었습니다.

유생들은 오륜을 범하거나, 윗사람을 업신여기다든 지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받았습니다.


기숙사는 생활의 중심 

 

▶ 서울문묘 명륜당(그림:문화재청)-명륜당에서 주로 공부하고 그  앞에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유생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기숙사인 재(齋)였습니다.

상재생은 하재생이 잘못하면  벌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벌은 매우 엄격했는데 식당에 참여
하지 못하게 하는  ‘식손(食損)’과 재에서 쫒아내 퇴학시키는
‘출재(黜齋)’가 있었습니다
.

유생들의 자치 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습니다. 

임원은 회장인 장의, 규율담당 색장, 서기를 맡은 조사, 회의 의장인 당장 등이
있었어요. 
장의는 동ㆍ서재 각 1명으로 2명이었습니다.

 

성균관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대개 재회를 통해서 자치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조선시대 정책 결정이나 인사 문제, 문묘의 승무문제 등 대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으로 맞섰습니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하는 것이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어요. 권당은 유생들이 모두 성균관을 떠나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나중에는 당파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리들보다는 비교적 순수하게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


▶왕세자입학도첩-1817년(순조17) 효명세자의 성균관입학례 모습입니다.

조선의  왕세자는 나이가 되면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
했습니다.
물론 입학식을 하고 성균관으로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을 하였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과거시험을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 문과 뿐 아니라 봄과

가을에 왕이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할 때에는  알성시도 실시되었습니다. 

 

성균관은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인 만큼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성균관의 자랑

이었습니다. 시설뿐 아니라 가르치는 교수도 최고였겠지요. 당대에 가장 학문이 깊은

학자들이 교수를 맡았습니다. 또 성균관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쌓은 인연들은 나중에

학자와 관리가 된 다음에도 중요한 인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서울문학사학회, <조선시대 서울사람들 2>, 어진이, 2003.

이원호, <조선시대 교육의 연구>, 문음사, 2001.

임용한, <조선시대 관리등용제도 연구>,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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