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에게 바치는 예의 - 목인 박물관에 가다

 글: 하늬바람~ 

인사동 목인 박물관 안 모습

상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벌써 20여 년 전이라, 정확히 어떤 상여였는지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붉은 원색의 강렬한 느낌, 그리고 꽃이 화려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만장 휘날리며 걷던 길. 종을 울리며 부르던 상여가와 제법 쌀쌀한 가을이었는데도 산소 한가득 퍼지던 햇살이 따사로웠지요. 그 당시에도 흔한 장례식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가까운 지인들의 마지막은 다 병원에서였고, 흰 국화로 장식한 검은 세단으로 떠나는 장례였습니다. 이제 죽음도 우리에겐 가벼워지는 것일까요? 정말, 어느덧 우리는 마을 공동체가 해체된 시대에 살고 있더군요.

용수판 중 대장용 

<목인은 죽은 이의 길동무들이다>
목인이란 말이 생소하지요? 굿, 불교 의식, 상여에 꽂는 나무 인형, 그 밖에 솟대나 혼례식에 쓰는 기러기 등 나무로 조각한 것들을 넓은 의미에서 목인이라 하지만, 오늘은 상여에 꽂은 인형으로 좁혀서 ‘목인’이라 칭하겠습니다.

그 옛날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이 마을 전체의 일이었을 때, 마을마다 목상여를 만들어 상엿집에 보관해 두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목상여를 장식했던 동물, 꽃, 사람들을 목인이라 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죽은 이의 길동무입니다. 살았을 때 어땠는지는 몰라도 죽어서는 다 같은 사람이라는 참으로 평등주의적인 생각을 우리 조상들은 했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 죽어도 화려하게 꾸민 상여에 태워 저승길이 초라하지 않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이면서 동시에 이승에 남지도 저승에 가지도 못하는 주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요.

호랑이를 문 용과 흥부놀부 용수판 

<하늘나라로 갈 때는 용을 타고 가셔요>
상여의 상단 앞뒤로 반달 모양의 용수판이란 것을 부착합니다. 당연히 용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 모습도 각양각색이더군요. 물고기를 문 용, 호랑이를 문 용, 비익조를 새긴 용수판, 흥부놀부 용수판도 있습니다. 심지어 얼굴이 새까매서인지 ‘오바마’라 이름 붙인 용수판도 있더군요. 다 각각 바라는 바를 담았을까요? 아무래도 바닷가 마을에선 물고기, 심지어 낙지를 무는 용이 죽은 이를 실어다 주길 바랐을 테고, 산골마을 사람들은 호랑이를 문 용이 데려다 주길 바랐을 테지요. 20세기로 갈수록 용수판의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더군요.

흔히 용은 임금 즉,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 그리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 이런 용도 죽음 앞에서는 만인의 용이 되어 저승길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목인들은 왜 호랑이를 탔나?>
호랑이하면 떠오르는 것은? 산신령 또는 산신령의 심부름꾼. 산신도를 보면 대개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교의 영향으로 산신이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호랑이가 심부름꾼쯤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 신앙의 하나로 산신제를 올릴 때 호랑이는 산신으로 신격화됩니다. 맹수 중의 맹수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 아래에 있던 외갓집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호랑이가 나온다는 고개를 넘으려면 사촌들과 무리지어 나무칼까지 차고 우르르 달려서 넘어 갔더랬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옛이야기의 주인공쯤으로 감정이입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도 머릿속에 오만 상상을 하며 공포에 질렸고, 때론 그 공포를 즐겼던 기억입니다.

목인들 가운데 유난히 호랑이를 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뜻과 더불어 죽은 이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 주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호랑이에 앉은 망자는 어떤 어려움 없이 저승길로 인도되었을 것입니다.

망치를 든 저승사자와 도끼를 든 순사 

 <죽은 이를 지켜주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목인들은 봉황이나 학을 탄 선비, 동자, 산신령들이 많았습니다. 봉황이나 학은 태평성대를 알리고 고고한 인품을 자랑하는 금조(錦鳥)들이고, 그 신성한 금조를 탄 이들의 신분도 범상치는 않았습니다. 평생을 개똥밭에서 참외 구르듯 살았는지 몰라도, 그곳에서도 인물 난다고, 학식 높은 선비가 되고 힘센 장수가 되어 저승길을 함께 합니다. 저들이 망자 자신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 중 일제 강점기 때는 순사가 등장하네요. 이때쯤 되면 붉은 낯빛에 망치를 든 저승사자보다 말 탄 일본 순사가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상여에 부착하는 목인조차 시대 인식의 소산임을 느끼게 됩니다.


남사당패 목인  

<잘 죽었구나~ 가는 길 신나게 한판 놀아보세>
가슴 찡하게 다가온 목인들도 있었습니다. 온 식구를 목인으로 만들어 장식한 것은 이승에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서였을까요? 그런 미련을 무 자르듯 떨치고 저세상 가는 길 한판 놀아보자는 남사당패 목인들도 있더군요.

슬픔에 잠겨야 할 초상집에서 “아이고 아이고 잘 죽었다. ……뭐를 많이 벌어놔서 그다지도 잘 죽었노. 속이 다 시원하지!”하고 넋두리를 하듯이 구정지게 노래를 합니다. 이런 상여놀이를 진도에서는 ‘다시래기’라고 하고, 경상도에서는 ‘대돋음’, 전라도에서는 ‘상여 어른다’고 하네요. 다시래기란 말 자체에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다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아예, 남사당 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살판 땅재주놀음을 펼치는 이를 보세요. 힘껏 물구나무선 종아리에 팽팽한 기운이 오르고, ‘삘릴리’ 날라리 소리로 하늘로 죽음을 띄워 보냅니다.

삶과 죽음, 슬픔과 흥겨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한바탕 살다 간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한바탕 놀다 가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죽음이 공동체의 문화로 승화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혼백을 실어 나르는 가마를 영여, 또는 가마채가 허리까지 온다 하여 요여라고 한다.

<상여는 영여의 뒤를 따라간다>
색깔 고운 작은 가마엔 누가 탈까요? 돌아가신 분의 혼백과 신주를 태워 오는 가마입니다. 상여가 주검을 실어 나르는 가마라면 영여는 영혼을 실어 가는 것입니다. 가끔 영구차 앞에 죽은 이의 사진이나 혼백을 실은 승용차가 앞장서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영어도 이젠 승용차가 대신 하는 것이지요.

보통 영여(요여)의 지붕에는 녹색 바탕에 연꽃을 조각하고 옆에도 연꽃망울을 장식한다는데, 목인 박물관의 요여는 높이 있어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꽃은 다시 피어나는 재생의 의미. 연꽃 또한 영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연화화생, 심청이가 연꽃 속에서 살아오는 것 등이 모두 부활의 의미겠지요. 무엇보다 영혼을 주검보다 우선했던 옛사람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산청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상여는 분해 조립이 가능하다. 그래야 두고두고 쓸 수 있으니까. 보통 이승의 집처럼 상여에도 용마루가 있고 위에 염라대왕, 저승사자, 강림도령을 차례로 태운다. 그리고 봉화, 호랑이, 온갖 목인으로 장식하는 상여는 저승으로 가는 길에 임시로 거처하는 집이자, 또 하나의 이상적인 집이다. 그래서 상여는 화려하다.(사진 문화재청) 


목인 박물관 전경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람은 죽습니다. 그 당연한 죽음에 진심을 다해 예의를 보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몇 십 년 전의 어머니 아버지들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제 화려한 상여를 타고 가실 순 없게 되었지요.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어 있는 목인들을 보니, 살아서는 개똥밭에 굴렀을지언정 저승에서라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죽은 이에 대한 예의는 지금 무엇으로 남아 있나 묻게 됩니다.

목인의 아름다운 빛깔에 취하고, 재미있는 발상에 감탄하고, 죽은 이와 함께 하는 정성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문득, 망자의 말을 전하는 상두꾼들의 상엿소리가 아직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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