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나라 문화 ․ 유적 살펴보기 - 중국



중국 불교의 아름다움, 용문석굴

참세상


* 부처를 받아들인 뜻은......


중국은 다양한 종교를 믿는 나라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도 그 중 하나입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기원후 2세기의 일입니다.

 

불교가 공인된 5호16국 시대.

4세기에서 6세기 말까지 양쯔강을 사이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많은 나라들이 세워지고 망하게 됩니다. 이때를 흔히 역사에서는 5호 16국 혹은 남북조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많은 나라 특히 북 중국의 나라들에서 불교는 발전하게 됩니다. 북쪽 나라들의 황제와 귀족들은 원래 중국인과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만리장성 너머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던 유목민이지요. 그런데 4세기 초, 중국이 힘이 약해지자, 유목민들은 만리장성을 넘어 쳐들어와서 중국인 왕조를 남쪽으로 몰아내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목민 출신의 황제와 귀족들은 자신들보다 많은 중국인을 다스리기 힘이 들었어요.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은 노자라는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도교를 많이 믿고 있었죠. 그래서 유목민 황제는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삼고 사람들에게 믿게 했죠.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어요.


* 용문을 지나면 부처의 나라가


불교가 나라의 종교가 된 이후 황제와 귀족들은 각지에 불교사원을 세웠어요. 특히 절벽에 굴을 파고 부처의 모습을 한 동상을 세우는 석굴사원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거대한 벌집과 같은 모습으로 붉은 빛 감도는 바위 산 전체에 숭숭 굴들이 파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중국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용문석굴(룽먼석굴: 龍門石窟)이 그 곳입니다. 무려 400여 년에 걸쳐 산 전체에 2,345개의 석굴과 11만여 개의 불상이 새겨졌습니다. 석굴과 불상을 만들어 놓은 솜씨가 중국 예술의 빼어남을 보여주지요.

용문 석굴은 뤄양(洛陽) 남쪽에 있습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서산(西山)과 동산(東山)으로 갈리는데 입구에서 석굴 쪽을 바라보면 서산과 동산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와 강이 흐르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문처럼 생겼죠. 그래서 수나라 때부터 이를 ‘용문(龍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측천무후를 닮은 부처

용문석굴 사원들.

 

봉선사의 대불들.

다리 밑을 지나 서산(西山)에 들어서면 석회암 암벽에 크고 작은 수많은 동굴이 뚫려는데 이 각각의 동굴 안에 엄청난 수의 불상을 새겨 놓았죠. 이곳에 석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북위라는 나라가 493년 뤄양으로 수도를 옮겨온 뒤였습니다. 공사는 10세기 이후 송(宋)나라 때 마쳤어요. 하지만, 주요 부분들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석굴의 약 30%는 북위시대에, 60% 정도는 당나라 때에 조각됐지요.

작은 불상에서부터 10m 가 훨씬 넘는 큰 불상에 이르기까지 불상들은 제각기 섬세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죠. 서산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라는 석굴은 10m 가 넘는 거대한 불상 9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9개의 불상 가운데 특히 빛나는 것은 역시 중심 부처인 ‘노사나대불(盧舍那大佛)’입니다. 높이가 17m, 머리 4m, 귀가 1.9m인 엄청난 크기의 대불은 은은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어 그 크기에도 불구하고 위압감을 주지 않지요. 얼굴은 동그랗고 눈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이 큰 불상의 공사를 언제 시작했는지 자세한 역사기록은 없지만, 당나라 측천무후가 공사를 열성적으로 지원해 675년 완공됐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부처의 모습이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 땄다는 주장도 있지요.

용문석굴에서 아쉬운 것은 곳곳에서 많은 불상들의 목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도굴꾼들에 의해 해외로 팔려 나가거나,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 시기에 훼손된 것도 있습니다. 모두 인간의 잘못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