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그 인물 - 6학년 1학기 사회 : p106

 

 

진정한 평화주의자, 안중근 (1)

참세상 


*한발의 총성이 세상을 깨우다.

19세기부터 서양 사람들은 강한 군사력으로 동아시아로 진출했습니다. 동아시아인들은 서양 사람들이 벌인 식민 정책의 희생자였어요. 20세기 초,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지요. 서양의 나라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그들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침략에 대해 대응하지 못한 조선인은 놀림과 무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 자신이 약해서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을사조약 시 경운궁 대안문 앞.

무기력과 패배감이 조선을 감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하얼빈 열차 역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세상에 조선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어요.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피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해낸 사람이 바로 안중근(安重根)이었습니다. 올해는 그가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중근에 대해서 한· 중· 일 삼국 사람들은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의 생애 

안중근은 1879년(고종 16)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진사 벼슬을 하였으며 황해도 지방에서 학문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지요. 그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어서 김옥균의 개화당을 지지했어요. 1884년 개화당의 정변이 실패하자 황해도로 이주했어요. 안중근은 1896년 명동성당에서 아버지와 함께 천주교에 들어가 빌렘 신부(J. Wilhelem)에게서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어요.

안중근 일가에게 세례를 해준 빌렘 신부

안중근은 원산과 간도를 거쳐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08년 이범윤(李範允)을 대장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참모중장으로 의병 300명을 이끌었어요. 그는 함경도, 경흥, 회령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죠. 이 때, 일본군 포로를 총살시키지 않고 국제법에 따라 석방시키기도 했어요. 평화주의자로서 그의 면모가 잘 보여 지는 이야기이지요.

 

거사 직전과 순국 직전의 안중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1909년 2월, 연해주에서 안중근 등은 동의단지회를 결성했지요. 이 단체는 조선 친일파와 조선 침략의 책임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한 단체였어요.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공으로 초대통감을 거쳐 추밀원 의장에 올랐지요. 그래서 안중근은 침략의 책임이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 대상으로 삼았어요.

을사조약 체결 직후의 이토 히로부미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신 코코프체프(V. N. Kokovsev)와 하얼빈에서 회담하기 위해 오게 되었어요. 안중근은 암살 계획을 세워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지요.

 

피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어요. 그는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을 예정이었죠. 이토 히로부미가 환영인사를 하려고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안중근은 그에게 다가가 권총 3발을 쏘아 명중시켰지요. 그리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가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등에게도 총을 쏘아서 중상을 입혔습니다.

사건 직후, 러시아군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뤼순의 일본 측에 인도되었어요. 심문과정에서 안중근은 일본인 검찰관에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들었지요. 특히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 평화를 해쳤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과 권총상자


자신은 조선군 사령관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으므로 만국공법에 의한 포로 신분임을 강조하였어요. 재판 과정에서 그의 당당한 태도와 논리 정연하고 막힘없는 반박 진술에 일본 재판장과 검찰관도 탄복할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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