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동그라미

오늘은 몽촌토성에 이어 3.5km의 가장 긴 담장에 둘러싸인 마을, 풍납동을 찾았습니다.
왜 풍납동이냐구요?
맞아요. 한성백제(BC18~AD475)의 왕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풍납토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1925년 일제시대에 일어난 을축년 대 홍수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토성입니다.
지도상으로는 어디쯤일까요?
북쪽 적군인 고구려군을 막기위한 방패막이로 한강을 해자로 삼고 있는 풍납토성입니다.
그래서 하남(강 남쪽) 위례성이라고도 합니다.


풍납동은 예전에도 천가구나 살았다는 대규모의 동네 천호동과 길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요.



몇년 전만 해도 높은 토성아래 무허가 천막집이 즐비했는데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탈바꿈을 했답니다.


첫 발굴은 일제시대였지만 당시 역사학계의 우두머리였던 이병두씨에 의해 사성으로 오해받고 역사속에서 사라졌어요. 광복 후 서울대  첫 졸업생을 앞둔 고고학과의 마지막 야외실습용으로 잠깐 발굴작업이 있었지만 역시 이병도씨의 발표를 따를뿐 별다른 이견없이 지나가버렸어요.

그런데 이제와서 왜 이곳을 한성백제의 왕궁터라고 할까요?
잃어버린 왕국, 한성백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에는 한 사람의 열렬한 백제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문대 이형구 역사 고고학 교수입니다. 1997년 설날아침에 마침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던 이곳에 들러 벽에 하나가득 박혀있던 천오백년 전의 수 많은 백제 유물들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기와조각과 흙으로 만든 상, 하수관(토관), 건물의 기둥을 세우는데 견고함과 권위를 나타내는 8각 주춧돌(초석)입니다.



토관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구요?
사람이 오랫동안 한 곳에 살려면 우선 깨끗해야겠지요.
선사시대 사람들도 자기들이 먹은 조개껍질은 한 곳을 정해놓고 쓰레기장으로 했을정도니까요.
하물며 왕이 사는 곳이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 토관이 바로 하수물이 나가는 하수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일이 하나씩 흙으로 빚어서 연결시킬 정도라면 그곳에 사는 사람의 지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주춧돌을 보면 고구려 주몽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들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만나기위해 꼭 찾아야만 했던 각진 바위와 그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 유리는 궁궐에서 이러한 주춧돌 사이에 세워진 나무기둥에서 부러진 칼을 찾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석은 분명 궁궐에서 쓰여진 장식품이었겠지요..

풍납토성은 97년부터 어렵게 어렵게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발굴의 첫 삽을을 떠게 되면서 발굴단과 지역 원주민들사이는 몸싸움도 만만치 않았어요.
토성안에는 이미 수많은 가구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를 발굴하게 되면 지역주민들은 집을 마음대로 고칠수도 없고 별다른 보상도 없이 강제 퇴거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형구교수는 끊임없는 원주민들의 협박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가족들도 모두 대피할정도였다고 합니다. 풍납동 골목에는 이형구 교수를 향해 붉은 페인트로 원한의 메세지를 적은 프랜카드가 이곳 저곳 걸려 있었구요.
지금까지도 발굴을 반대하는 모습이 이곳저곳에 남아있네요. 

하지만 22만 6천 여평의 토성 안 중에서 2천 여평의 공사장 안에서 발굴된 유물만으로도 우리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궁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습니다.
유물뿐만 아니라  높이 11m, 아랫변 40m가 넘는 3.5km의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지금도 21세기의 높은 아파트가 냉정하게 내려다 보는 가운데 5세기 이전의 한성백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발굴현장입니다.

나오는 길에  토성의 허리를 자르며 길게 늘어서 있는 원주민 시장을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맛난
수제 어묵도 사 먹습니다. 아주머니들이 큰 목소리와 함게 역시 길 건너편의 백화점보다 엄청
쌉니다. 허리 잘린 토성의 모습이 마치 한성 백제로 우리를 태우고 갈 고속전철같이 보이네요.

오백년 한성백제의 비밀을 품고있을 풍납토성,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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