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2학기 _ 옛도읍지와 문화재

고려의 도읍지 개경

글 : COSMOS

혹시 우리 역사에 있었던 여러 나라를 알고 계신가요?
우리는 그 나라들의 중심이었던 도읍지를 찾아 역사를 공부하기도 하고 도읍지가 위치했던 곳의 뛰어난 풍광을 즐길 수도 있겠지요.

919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을 새 나라의 도읍지로 삼아 약 500년간 나라의 중심으로 삼았던 개성(그 당시에는 개경)은 그런 면에서는 우리에게 아쉬움을 주는 곳이랍니다.

어느 정도의 왕래가 허용되었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방문하여 고려 500년의 역사를 돌아보기에는 내용면에서나 활동상 아직까지 아쉬움이 있는 곳이죠.

이제 기록에 의지하여 고려 도읍지 개성을 돌아볼까요?

만월대

도읍지는 흔히들 말하는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한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나라를 세울때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태조 왕건은 개성을 도읍으로 정한 뒤 충실하게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궁궐 건축을 하게 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궁궐터 만월대의 초석과 그 당시 고려를 방문한 중국사신 서긍의 < 고려도경 >이라는 책을 통해 짐작하건데
송악산 경사면을 그대로 살려 겹겹이 포개진 형태의 건물 배치를 한 역대 최고 수준의 궁궐을 이루었다고 하네요.

멀리서 보아 3층 구조의 궁궐은 산을 배경으로 사찰의 이미지를 보였을 것이라 추측하는데 굉장히 화려했다는 기록이 있네요.

그 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초기의 궁궐은 대부분 불에 타 버리고
중건과 재건을 계속하게 되는데
의종 (1146 ~ 1170 )대에 이르러 왕의 호사스런 취향과
청자의 발달에 힘입어 장각궁, 양이정과 같은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의 극치를 이룹니다.
그 후 무신의 난으로 궁궐의 중건도 부진하게 되고
몽골, 홍건적, 그리고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뛰어난 건축물은 상상속에서야 그려 볼 수 있겠네요.


선죽교

혹시 고려의 멸망이 포은 정몽주의 죽음과 거의 때를 같이 한다는 것을 기억 하시나요?

비록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하지 못해 그 일파에게 죽음을 당하지만 그 높은 절개와 충성심은 그 후의 조선에서도 본받을 점이 있었나 봐요.

잘 보전 되어진 정몽주와 관계된 유적을 돌아보면 고려에 대한 생각이 마치 추억처럼 떠오를 듯합니다.
시의 동쪽 편 에 있는 선죽교와 그 곳에서 500미터 쯤 떨어진 숭양서원 등은 정몽주의 자취를 말해주는 곳이죠.

그 밖에도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강감찬 장군이 세웠다는 석탑과 궁궐의 여러 문 중 하나였던 시의 중앙에 위치한 남대문연복사의 대 범종 등이 우리가 개성을 방문하면 만나 볼 수 있는 옛 시대의 증거물이죠.


개경의 남대문

정치 상황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개경으로 향하는 문.

언제나 자유로이 그 문을 드나들 수 있을까요?
오늘도 고려는 우리에게 그 역동적이고 찬란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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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유적은 주로 북한에 있어 고려를 보기 위해선 정치적 여러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나마 남한에서 볼 수 있는 고려 유적은 파주 지역에 있습니다.
우리미래에서는 파주와 연천을 묶은 기행을 진행하고 있지요.

물론 역사의 흐름을 ppt를 활용한 시청각자료와 함께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실내프로그램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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